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복지사 1급 자격시험에 응시하여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봉사시간과 그 외 사무, 행정분야와 관련된 자격증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전공과 관련된 공공기관인 대한적십자사의 채용공고를 보고는 기계적으로 원서접수를 했다.
아, 참고로 내가 지금 나열하고 있는 내 모든 이력들은 수시채용이 아니라 모두 신입 공개채용이다.
대한적십자사의 채용과정은 서류전형 - 필기전형 - 1차 면접 - 2차 면접 - 최종합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류전형에서 7배수로 크게 경쟁률이 줄어들었기에, 당시 서류전형 가점에 해당되는 항목이 많았던 나로서는 약간의 자만일 수도 있지만 사실 서류전형 합격을 예상하고 필기전형을 준비했다.
그리고 필기전형도 무사히 통과했고, 이어지는 1차 면접은 토론 면접이었다.
내가 속한 조는 9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아치형으로 배치된 의자에 앉아 주어진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으로 토론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면접관분들도 앉아계셨지만, 남은 토론시간에 대한 말씀 외에는 특별히 개입하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면접장에 들어서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인해 한국산업인력공단 면접 때처럼 사회자로 나서지 않았다. 직감상 말을 많이 하는 게 불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언을 할 수 있을 때를 엿보다가 세 차례만 간략하게 의견을 말하고는 다른 지원자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사회자로 나선 한 지원자는 발언을 굉장히 많이 했지만, 면접관분들을 잠시 힐끗 보니 표정들이 좋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 지원자는 1차 면접 이후 다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차 면접은 다대다 심층면접이었고, 주된 질문은 대한적십자사의 사업 혹은 인성 관련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주로 내가 했던 봉사활동들을 풀어서 대한적십자사와 연관시켜 답변했다. 그리고 이곳은 내가 근무하게 될 나의 5번째 공기업이 되었다.
임용이 되어 배치가 되었고, 나는 구호사업과 구호교육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도 코로나가 아직 성행하던 시기라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뜨거운 여름이었고, 구호물품과 후원물품들이 쏟아지듯이 들어오고, 다시 병원 등으로 전달이 되곤 했다.
비록 대한적십자사에서 오래 근무하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감사한 분이 있다. 내 옆자리 사수이자, 내가 입사하고 퇴사할 때까지 물심양면 도와주신 H대리님이다. 지금은 승진하셔서 과장님이 되셨고,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시다. 나와는 나이차이가 3살 정도밖에 나지 않아서 정말 형처럼 의지했던 분인데, 업무능력, 성격, 인품, 심지어 비주얼까지 모든 면에서 팔방미인이신 대단한 분이셨다.
업무적으로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늦게까지 남아주셔서 같이 야근을 하기도 했고, 대한적십자사에서 내가 퇴사를 고민할 때에도 인간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셨다. 그 당시 가정이 있으신 상황에서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야 될 소중한 시간들을 포기하시면서까지 나를 챙기셨던 은인과 같은 분이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에 동기로 입사해 같이 근무했던 C라는 친구가 있다. C는 나보다 3살 어린 여동생이고, 당시 나보다 먼저 대한적십자사를 퇴사하고는 그 해 2021년 하반기에 국민연금공단에 입사했다. 나와 C가 당시에 카카오톡으로 나눈 대화가 있는데, 이 대화내용은 4년 뒤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고 나는 2025년 국민연금공단에 입사하게 되어 동기였던 C를 선배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 마지막 공기업인 국민연금공단에서 내가 최악의 상황으로 괴로워할 때, C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활용해서 나를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우리는 흔한 친구사이도 아니고, 연인사이도 아니고, 정말 친남매 그 이상의 특별한 사이로 지내왔다.
나는 C에게 사랑도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었고, 진심으로 만약 내가 죽어서 C가 행복할 수 있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만약 내가 C와 연인관계가 되면 나로 인해 C가 불행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C가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을 때 정말 다행이라며 누구보다 기뻐했지만, 나는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는 1시간 동안 숨죽이고 흐느끼며 오열했다. C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강남구도시관리공단 채용은 서류전형-필기전형-면접전형으로 진행되었고, 최종 2명을 뽑는 일반행정(청년) 분야에서 최종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공단에서는 여러 체육, 문화시설들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체육 관련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 업무는 주로 회계, 세무와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이 당시까지 자산, 부채, 자본, 차변과 대변과 같은 기초적인 회계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부서의 선배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당연히 이게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퇴근 이후와 주말에도 스터디카페에서 업무에 대해 공부를 했지만,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초지식부터 쌓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2달도 되기 전 빠르게 의원면직을 하고야 말았다. 사실 이렇게 몇몇 곳들을 짧게 근무하게 된 이유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최종합격자가 발표되고 보통 3개월 정도 기간 안에 최종합격자가 퇴사할 경우 1순위 예비합격자가 퇴사자의 자리로 바로 채워진다. 하지만, 일정 기간을 넘어가서 최종합격자가 퇴사할 경우에는 당장 충원될 수 없고, 다음 공채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채용절차가 다시 이루어진 이후 결원이 충원되곤 한다.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업무적으로 이후에 다행인 것은, 나는 강남구도시관리공단 퇴사 이후 입사하게 된 도봉구시설관리공단에서도 비슷한 세외수입(회계) 업무를 맡게 되었다. 강남구도시관리공단에서 꽤나 충격을 받아서 회계 공부에 집중해서 전산회계 1급과 전산회계운용사 2급 자격증도 취득하였기에, 도봉구시설관리공단에서 가장 오래 근무할 수 있기도 했다.
도봉구시설관리공단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곳인데, 내 경력상 최장기간인 2년 1개월 동안 근무한 공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사의 이유도 업무에 적응을 못해서가 아니다.
업무적으로 큰 인정을 받았던 때라서 이사장님과 상임이사님께 자주 대면보고를 드리기도 하고, 다양한 실적들이 쌓여 있기도 하다. 퇴사는 "저는 더 큰 물에서 놀고 싶습니다!"라는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퇴사 이후에 대형 공기업인 한국농어촌공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기관들에서 나의 이직이 3개월 안에 이루어졌지만, 한국농어촌공사은 6개월이 걸렸지만 말이다.
도봉구시설관리공단에서 근무하면서는 세외수입, 홍보, 안내데스크 등의 업무를 주로 맡아서 수행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업무를 하며 내 역량이 급성장하였고, 특히 홍보 업무에서 공단 전체에서 눈에 띄는 직원이 되곤 했다.
처음 입사해서는 안내데스크 업무를 주로 했는데, 당시 내 사수였던 P주임님이 없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매달 7~8천 명 정도의 구민들이 이용하는 수영장이 있는 체육센터였기에 안내데스크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근무환경도 열악한 편이었다. P주임님은 우리 어머니와 연배가 같으신 분이셔서, 3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통화와 식사도 하며, 엄마처럼 모시고 있다. 사실 모신다기보다는 내가 늘 응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근무할 때에도 P주임님께서 거의 엄마처럼 배려해 주시고 업무를 차근차근 배우다 보니, 이후 부서가 바뀌어서 내가 후배들을 가르칠 때나 업무를 할 때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한 분이다.
홍보 업무는 주로 보도자료 작성, 홍보물 제작, 공단 SNS 관리 등이었다. 여기서 나는 홍보물들을 제작하는 일에 가장 큰 흥미를 느꼈고, 창의적인 시도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서울시 자치구 산하 20여 개의 시설관리공단 중 최초로 공단송(공단 사가)을 직접 제작했다. 완성된 공단송의 저작권을 공단으로 넘기기 전에 퇴사를 해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공단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당시 이사장님과 상임이사님과 1:1로 대면해서 진행상황을 보고 드렸었다. 무엇보다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만들고 보여드린 것이라 윗 분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다.
회계 업무는 지식으로 공부한 부분도 있었지만, 실무에서는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많았기에 초반에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퇴사할 시점이 되어서는 후배에게 13페이지 정도 되는 나만의 필살 노하우가 담긴 업무인수인계서를 줄 만큼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부서장님도 나를 본부로 데려가서 쓰시려 했을 만큼 내 역량을 신뢰하셨고, 나는 부서 내에서 실무적으로 꽤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직장생활 중에서 어찌 보면 최고의 역량을 발휘했던 전성기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당시 상황에서 만족하지 못했고, 더 큰 물에서 놀겠다는 다소 배짱 있는 포부로 입사한 지 2년 1개월이 지난 후 퇴사를 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퇴사를 해도 늘 금방 합격했던 이력들이 쌓여서 그랬을까. 나는 도봉구시설관리공단을 배짱 있게 퇴사했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산업보건협회와 서울시메트로 9호선 두 곳을 비슷한 시기에 서류, 필기전형에 합격하여 최종면접까지 가게 되었다. 비록 필기시험을 볼 무렵 코로나에 걸려서 고열과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며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음, 두 곳 중에 어디를 선택해야 하지?" 하며 최종합격을 한 것 마냥 혼자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여태 면접에서는 거의 떨어져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보기 좋게 대한산업보건협회와 서울시메트로 9호선 두 곳의 최종면접전형에서 연속으로 불합격을 경험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 두 곳의 최종합격자 발표일의 간격은 불과 3일이었다. 나는 한 곳에서의 불합격의 충격을 잊기도 전에 2연속 최종불합격이라는 내 인생에서는 전무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록 두 곳 모두 공공기관보다는 사기업에 속하는 곳들이었지만, 내 멘탈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한 달 정도는 공부도 안 하고 괴로워하며 지냈던 거 같다. 그래도 나는 기계적으로 매일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지원을 하던 몸이라 하반기 한국농어촌공사, 국민연금공단, 국립중앙의료원 3곳에 큰 기대 없이 입사지원을 했다. 이 기관들의 필기전형을 같이 준비하려면 공부할 것도 많아서 당시 의욕을 상실한 나에게는 사실상 확률이 0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국민연금공단에 근무하고 있던 내 대한적십자사 동기 C가 생각났다. 나는 C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 현재 상황과 괴로움을 토로하며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C는 "오빠, 걱정하지 마. 오빠는 무조건 잘 될 거니까 힘든 일 있거나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알았지? 늦은 밤에도 괜찮으니까 무조건 전화해." 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나는 자주 C에게 의지하며 공부를 이어갔고, C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필기시험 결과를 앞두고 불안해하고 있는 나에게 C는 "오빠만큼 열심히 한 사람 없어. 오빠는 무조건 될 거야. 면접이나 준비하자."라며 만나서 면접준비를 도와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농어촌공사, 국민연금공단, 국립중앙의료원 모두 필기전형에 합격했고, 3곳의 면접전형을 앞두게 되었다.
C가 퇴근한 저녁시간에 카페에서 만나서 면접전형에서 답변해야 할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내가 기존에 준비했던 답변들은 C의 주저 없는 피드백으로 인해 퀄리티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국농어촌공사 최종합격, 국민연금공단 최종합격,
그리고 국립중앙의료원은 1차 면접은 합격했지만 2차 최종면접에서는 아쉽게 떨어져서 3전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도봉구시설관리공단을 퇴사한 지 6개월이 걸려서 얻은 값진 성과였다. 2승을 했으니 두 곳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는 여러 조건들을 비교해 보며 고민 끝에 한국농어촌공사를 선택했다.
나의 이러한 선택에 C는 "오빠, 그래도 잘 돼서 다행이다. 근데 오빠 성격에는 연금이 더 맞는 거 같아. 다음 상반기 채용 때에는 후배로 들어와."라며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은 놀랍게도 6개월 뒤 현실로 이루어졌다.
C의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이어질 것이고, 이제 내 8번째 공기업인 한국농어촌공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한국농어촌공사에 임용이 되어 경기도 연천군으로 발령이 났다. 본가에서 차로 운전해서 편도 50분 정도의 거리였고, 내 업무는 회계, 세무 쪽으로 분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사발령시즌이라 나와 같이 연천지사로 발령을 받은 J선배가 있었는데, 이전 지사에서 회계, 세무 쪽으로 역량을 인정받은 능력 있는 선배였다. 나로서는 지사에서 모르는 걸 여쭤볼 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J선배가 업무를 가르쳐주다가 뭔가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사의 회계가 심하게 꼬여있었다. 계정과목이 틀리거나 전표처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은 양반이었고, 원천세 등 세무 신고가 잘못되어 있어서 24년 초부터 새로 계산해서 수정신고를 해야 되는 등 신입인 나로서는 전산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J선배가 있어서 거의 맨투맨으로 달라붙어 하나씩 도와주었다. 다른 차장님과 과장님들도 이런 상황을 아시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고, 해결을 하려고 나름 많이 애를 썼다.
나와 J선배는 거의 매일같이 야근을 하며 꼬여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J선배에 비해 회계지식도 부족했고 시스템에 미숙한 신입이었기에 J선배가 사실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운이 좋지 않게 업무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더 큰 문제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북극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듯이.
내 몸이 한계를 느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의 신호를 무시했고, 마지막 9번째 공기업인 국민연금공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다만, 목숨을 걸고 국민연금공단을 준비해서 입사하게 되었다는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떻게 목숨을 걸었기에 마지막 공기업이 되었는지는 이어지는 화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