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이제 더 이상 힘이 없어

by 명쓰
몸이 이상하다.


나는 병가를 내고 종합검진을 받을 수 있는 대학병원을 급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병원들로부터 빨라야 몇 개월 뒤에 가능하고 어떤 곳들은 내년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답변밖에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내 핸드폰 통화기록이 계속 늘어가던 중, K대학병원으로부터 "당장 내일도 가능하시니까 아침 일찍 오세요."라는 눈물 나게 반가운 답변을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통화를 끊고는 병원 근처 숙소를 예약한 뒤, 간단히 짐을 챙겨서 힘겹게 문을 열고 출발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단지 내가 앉아있는 시외버스 좌석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을 뿐, 내 초점 없는 눈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조금 넘은 늦은 저녁.

조금 퀴퀴한 냄새가 있는 방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별다른 잡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새벽 2시가 되어서도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다시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새벽 3시 30분경 숙소를 나왔고, 병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도앱으로 확인해 보니 도보로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검진 받으러 가는길.jpg 새벽 4시 21분. 나는 병원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택시가 몇 대 보이긴 했지만, 거리는 너무나 한산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탓에 병원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고, 지루함과 피곤함이 익숙해질 때쯤 검진이 시작되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검사를 했고, 갑상선 초음파와 위내시경은 당일 간단하게 결과를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일 확인한 결과로는 갑상선 결절과 미란성 위염 등이 발견되었다. 결과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간호사님과 내 상황을 비롯한 여러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 나온 결과로는 당장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다만, 현재 내 상황을 들으시고는 신체적인 문제보다는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인 문제가 더 커 보인다고 하셔서 신경정신과 진료를 권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결과는 시일이 걸리니 추후 연락을 기다리면 된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터덜터덜 병원을 나와서 다시 내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지사 건물이 보였고, 냉장고 안에 쌓여있는 죽도 여전했다. 내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알게 된 많은 분들이 기프티콘으로 죽을 보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지만, 장기가 소화시킬 수가 없어서 그 감사함조차도 계속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저녁. 나는 내 모습과 상태를 잘 모르시는 부모님을 뵈러 본가로 가기 위해 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1시간 30분쯤 어둑한 길을 운전해서 도착한 본가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 몰골을 보신 어머니는 바로 눈물을 터뜨리셨다. 나는 말없이 내 방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고, 어머니는 내 오른편에 앉아서 나를 끌어안고 계속 미안하시다며 오열하셨다. 그리고 내 티셔츠 오른쪽 절반은 모두 어머니의 눈물로 젖어있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를 밀어내려 했지만 뼈만 앙상해진 팔로는 환갑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의 힘조차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네가 행복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엄마, 아빠도 너의 능력을 인정한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그동안 고생했고 엄마, 아빠가 미안하다."



이제는 내가 오열할 차례였다. 어머니의 이 짧은 말씀으로 인해 내가 그동안 끌어안고 있던 고통과 압박감의 삶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모습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 삶의 터널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혼자 걷는 터널이라 힘껏 소리쳐도 내 목소리뿐이었고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 터널 속이었다. 어두워서 불을 피우려고 했지만,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열정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있었고, 열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되어 나는 당당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걸어가다 보니 벽으로 막혀있는 막다른 길이 나왔다. 다른 우회로는 없었다. 나는 그 벽을 부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주먹으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뼈가 부러진 느낌이 들어 더 이상 벽을 칠 순 없어서 발로 벽을 두들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쪽 다리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벽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남은 한쪽 다리로 계속 걸었지만 막다른 벽은 계속 등장했다. 하지만, 나는 등장하는 모든 벽을 내 신체 전부를 사용해서 부쉈다. 더 이상 벽은 없었지만, 처음에 내가 열정으로 만들었던 불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듯했다. 그리고 내 눈조차도 이 터널이 어둡다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멀어있었다. 그렇게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느꼈다. 이 비는 34년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터져버린 비구름의 구슬픈 눈물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힘들게 몸을 일으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부모님께서는 지금 몸으로는 무리니까 한숨 자고 가라고 말리셨지만, 나는 지금은 반드시 되돌아가야 한다며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미 마이너스가 된 에너지와 정신력까지 끌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때까지도 어머니의 눈물로 젖어있던 내 티셔츠는 아직까지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주말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했고, 핸드폰의 사진앨범들을 쭉 보다가 우연히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예전에 우리 형이 나에게 따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형이 곧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면 엄마, 아빠한테 예전만큼 신경을 못쓸 거야. 이제는 네가 엄마, 아빠 옆에서 잘 챙겨줘."



형의 말을 듣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일부러 12월 31일 출발과 1월 1일 도착하는 일정으로 계획을 짰고, 렌터카로 어머니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관광지도 다니면서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와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태양과 1월 1일 또 다른 한 해의 첫 태양을 같이 보았다. 나는 형의 출가로 인해 빈 둥지 증후군을 느끼는 어머니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나와 어머니 둘 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의 사진을 보고는 나는 토요일, 일요일 이틀 내내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주도여행 엄마.jpg 제주도로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대비되어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2025년 8월 29일 자로 의원면직하였으며, 내 길고 긴 공기업 생활과 고통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제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최대한 압축해서 표현했습니다. 다소 매끄럽지 못했지만 제 과거로의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화에서는 현재의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제 삶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로 느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화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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