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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Aug 17. 2020

고리타분 but 나의 위로

82년생 김지영

이 책이 화제와 논쟁의 중심이 되었을 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남녀 차이는 없고 남녀 차별 이슈로만 몰고 가서 사람들 편을 갈라 나누는 것이 싫었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흥분한 동네 언니는 우리 때랑 비교해 보면 지금은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고 열을 내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요구가 과하다고 했고 내 생각도 그랬다. 애 둘에 직장 다니며 살림 살고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미칠 듯이 저주하던 내 시절과 비교해 보면 지금은 어린이집도 많고 나라에서 주는 돈도 있는 것 같고 우리 때보다 나은 것 같은데 애 본다고 자아를 못 찾아 힘들어하는 주인공 또래의 젊은 엄마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크게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애 키우는 것도 참 중요한데 주인공은 왜 저렇게 애보고 집에 있는 것이 자신을 잃어가는 것처럼 유난히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나가서 일만 하면 자아가 찾아지고 만병이 치유되고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젊어서 그런가? 남편도 그만하면 되었던데.


그러다  이 영화를 보고 울면서 내가 위로받을 줄이야.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엄마들은 딸에게 희생을 세뇌한다. 오빠를 남동생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집을 도와주고 시집가야 한다고 푸념으로 눈물로 한숨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알게 모르게 딸들을 세뇌시킨다. 북한 주민만 세뇌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세뇌당한 대로 나보다 가족을 챙겼다. 어느 날 돌아보니 엄마는 이제 집안이 먹고살만한데도 아들만 챙긴다.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멈추고 싶은데 터질 듯이 몰려온다. 이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의 친정엄마가 아들만 보약을 지어온 남편에게 퍼붓는 분노에 찬 고함소리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저 엄마는 본인은 세뇌당했으면서 딸의 편에 섰구나. 이건 남녀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엄마의 대사 금 같은 내 새끼, 옥 같은 내 새끼는 딸의 슬픔을 이해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대사였다.


미안하다. 나보다는 좋은 시대를 사는데 왜 불평이 많냐고 함부로 생각해서, 밥통이 밥 해주고 세탁기가 빨래하는데 무슨 할 일이 많으냐고 말하는 할머니들처럼 생각해서. 나는 둘이나 키웠는데 애 하나 키우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맘대로 생각해서. 열심히 배우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나간 사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받고 이쁨을 강요받고 상냥함과 치열함을 동시에 요구받는 젊은이에게 나 때보다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멋대로 생각해서 정말 미안하다. 위로는커녕 아들은 키워보면 좀 모자라니 이해해 달라고 82년생 엄마들도 아들 키워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니 이해하고 살자고 아무렇게나 내뱉어서 반성한다.


기억하기도 싫고 잊어버리기도 싫었던 30대 육아 시절, 회사도 다녀야 했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두 가지 일은 처음이라 너무나 힘들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는 열이 나서 밤새 울고 정말 소원이 밤에 푹 자보는 것이었다. 아픈 아이와 상관없이 잘 자는 남편은 정말 대한민국 동포였다. 그 힘든 시절을 겪은 나는 이제 외서 딴소리다. 다시 한번 반성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힘든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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