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아들

by 천천히바람

"엄마, 우리 커피 한잔해요."

"커피......?"

아들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녀는 그 상황을 재빨리 소화하지 못해 아들을 올려다보며 어색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요, 내가 한잔 살게."

아들이 자신의 팔을 살짝 붙들었다. 아아......, 그것이 그렇게 고맙다니. 물속에서 각설탕 풀려버리듯 하는 자신의 마음이 딱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어쩔 것인가....., 자식이고 에미 관계인데. 아들과 커피를 마시는 것은 첫 경험이었다. 차 한잔 마시자고 하는데 이렇게 황송해하다니. 이러니 자식 버릇을 고칠 수가 없지. 그녀는 자신에게 쥐어지르듯이 말하며 아들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전유숙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다. 흔히 폼 나는 말인 것처럼 쓰이는 그 '대화'라는 것을 멋지게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할 얘기가 없었다. 상대는 남이 아닌 아들이었다. 그런데 할 얘기가 없다니....... 격조 있고 고상한 향기가 풍기는 그 어떤 말, 아들과 나눌 수 있는 화젯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 머릿속은 더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엄마, 나 가요. 아무 걱정 마세요. 정말 잘할게요."

출국장 입구에서 여권과 비행기표를 검사원에게 건네며 송재형이 말했다.

"그래, 조심히 잘 가. 밥 잘 먹고, 아프지 말고."

전유숙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이 말을 했다. 이 짧은 말을 하는데 목이 메어 말의 절반은 울음이 묻어났다.

그런데 아들은 벌써 등을 돌려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정글만리, 조정래 -



정말 멋모르고, 천지분간도 못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낳기만 하면 내 아이는 알아서 잘 크는 줄 알았다. 아이는 밤마다 울고 이유도 모르는데 아팠다. 먹이고 재우고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것은 20대 여자가 어느 날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척척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미칠 듯이 아이에게 정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처음에는 못생겨 보이던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발가락만 보아도 미칠 듯이 귀여웠다. 복숭아 같은 엉덩이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잠에서 갓 깨어나 눈을 감을까 뜰까 망설일 때는 귀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첫 아이인 아들을 그렇게 사랑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 아닌 사람을 그렇게 전적으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 순간은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 아들이 이제 여자 친구도 있고 장가를 보내도 될 나이가 되었다. 아들은 아주 효자도 아니고 엄마 말을 잘 듣지고 않는 걸 보니 알아서 독립적으로 잘 살 것이다. 하지만 정글만리의 윗글은 내 목숨과 하나였던 아들이 그의 마음에서 엄마를 떠나가는 것을 깨닫는 중년 여성들의 과정을 잘 표현했다. 내 아들은 나보다 더 젊은 어여쁜 여자 친구와 있는 순간이 더 즐거울 것이고 엄마와의 대화는 듣고 싶지 않은 훈계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삶을 살고 한때 몹시도 사랑했던 그는 그의 인생을 살도록 떠나보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예전에 한집에서 살았던 과거에 친했던 타인일 뿐임을 마음에 새긴다.


시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지 않았다. 장남인 남편이 취업해서 그 돈으로 쭉 생계를 꾸렸다. 남편은 결혼 후에도 당연하게 생활비와 제사비 등을 드렸다. IMF가 오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던 돈을 상환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 시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면서도 아이 보는 비용과 그전에 받던 생활비를 그대로 받았다. 날마다 대출을 갚은 돈이 없어 싸웠고 생활비와 다른 돈 문제로 남편과 싸웠다. 한집에 살면서 시어머니는 그 내용을 다 들었다. 대출을 갚을 돈이 없어 막막한 어린 며느리를 보고서도 시어머니는 우리에게 받은 그 돈으로 적금을 부었다. 내 월급은 어머니를 드리고 나면 정말 남는 것이 없었고 그런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친정어머니의 퇴직금으로 우리는 대출을 갚았지만 시어머니는 남의 일 보듯 어떤 상관도 하지 않으셨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식은 독립을 시켜야 하고 나의 생계를 내 자식에게 절대로 짐 지우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했다. 어머니는 장남과 분리가 되지 않았다. 함께 사는 내내 이해 안 되었던 그분의 행동들은 바로 분리가 되지 않고 여전히 품 안의 아들로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한다. 여전히 본인을 책임져야만 하고 보살펴야 하는 내 아들이지, 며느리의 남편은 아닌 그 마음에서 비롯된 시샘과 며느리에 대한 이유 없는 미움의 원천은 내 아들을 놓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들이 결혼해서 독립된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 자체는 알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끼리 가는 여름휴가는 없었다. 시어머니는 남편 친구 부부와 외식을 할 때도 동행하셨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건데 어떻냐고 모자는 말했다. 남편은 더 문제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어릴 때부터 장남과 함께 살 것이란 말을 듣고 자란 그의 머릿속에는 독립이란 말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아프고 나서 어머니를 작은 아들과 함께 사시게 했다. 설득과 지적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어머니는 여러 감정을 거친 후 마지막에는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가셨다. 그것이라도 가져야 더 잘 살 것이다. 이사 가는 날 시어머니에게 40년 이상의 세월, 어머니를 모신 장남에게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시고 서로 격려하라고 여러 말씀을 드렸지만 각자 자신의 건강을 챙기자는 말씀만 하셨다. 남편은 섭섭한 눈으로 물끄러미 본인의 엄마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것 말고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이 몹시 안쓰러웠다. 이사를 마무리 짓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어머니 방을 깨끗이 치워두었다. 당연한 효는 없다. 어머니는 장남과 며느리에게 받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면서도 불안하여 항상 돈을 숨기고 저금하신 금액을 속이셨다. 인연의 마무리는 좋게 매듭지으면 좋겠지만 세상 일이 다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안다. 남편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효자 소리 들어가며 가장의 무게가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왔고 처에게 이혼이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이제 우리는 싸울 일이 없다. 문을 열면 들리던 어머니의 불평소리도 없다. 즐겁게 살 것이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자란 내 아들은 알아서 똑똑하다. 부모와 같이 살 일은 없다고 공공연히 얘기한다. 물론 나도 그와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오면 반갑고 가도 반가운 그런 관계로 살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해주지만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도록 얘기해야만 한다. 어린 그는 나에게 충분히 기쁨과 찬미와 환희를 가르쳐 주었다. 과거에 몹시도 사랑했지만 더 날아가서 행복하기를 바랄 뿐 나는 그와의 아름답던 인연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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