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옆에서 벗이고 싶다.

경도인지장애

by 천천히바람

허민이 저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허공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인욱은 주춤하며 그 모습에 혀를 찼다. 그 허탈하고 근심 어린 모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검찰을 떠난 다음 한동안 그랬던 것처럼 허민도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든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질 수밖에 없다. 그 무게를 결정짓는 것도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요령껏 가볍게 질 수도 있고, 우직하게 무겁게 질 수도 있다. 그 선택 또한 오로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인생의 무게도 못 견딜 무게는 없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해서 오는 무게라면 더욱 그렇다. 다만 그 무게에 익숙해지고, 이겨 내는 과정에서 닥치는 고통과 괴로움이 외로울 뿐이다. 그 외로움은 혼자 견디어 내는 수밖에 없다. 그 쓰라린 인내는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허민 교수여, 너무 외로워하지 마시라.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없듯이, 외롭지 않은 인생도 없다. 고통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고, 기쁨은 나누면 두배로 커진다고 했다. 나는 당신의 옆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벗이고 싶다.


- 허수아비춤, 조정래 -




1995년, 그는 몇 권의 일기장을 내게 주었다. 젊은 시절 자신과 그의 가정사를 숨김없이 기록한 일기장을 주고 결혼하자고 했다. 복잡한 형편을 차마 말하기 뭣해 일기로 집안상황을 얘기했고, 일기장을 읽을 때와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할 때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 채 그저 연민과 동정이 생겼다. 내가 그와 그의 집을 좋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걸까? 연애 경험도 없이 책만 냅다 많이 읽어 세상사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걸로 착각한 몹시 멍청했던 나는 결국 결혼에 떠밀려 갔다. 씌여도 단단히 씌여 제정신이면 멈춰야 할 결혼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임신 중이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인내와 능력의 한계를 초과하는 남편과 오로지 그의 경제력에만 의지하는 그 뒤의 병품처럼 있는 가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금 아픈 남편을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지해 주는 그의 친가는 없다. 엄마도 동생도 연락이 없다. 40년 넘게 홀로 생활비를 대고 집안을 돌보던 그의 어깨에 놓였던 짐을 내가 강제로 내렸다. 그가 부디 편안하고 평안하기만을 바라며 나는 그의 짐을 내려버렸다. 그의 쓰라린 인내는 육체와 영혼을 키우는 자양분이 아니라 그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 아닐까? 매번 혼자서 결정하고 감당해야 했던 일들이 잘못되었을 떼에 질책만 있었을 뿐 감사함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잘못한 것만 기억한다. 그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원망도 많지만 그 모든 감정을 버리려고 몹시 노력 중이다. 답이 없고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에 대한 원망을 놓아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방향이 이제 가족에서 우리로 옮겨졌다. 서로를 보고 반갑게 웃고 하루가 감사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의 곁에서 든든한 벗이 되어야 한다. 보호자이면서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아채는 벗이 되어 좋은 곳, 좋은 풍경을 같이 보며 도란도란 인생을 보내고 싶다. 부디 그의 기억이 오래가기를, 그는 세상에서 제일 믿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 또한 삼십 년 세월을 함께 한 그가 이제는 가장 편한 친구가 되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나는 젊은 시절 그와 함께 하는 편안한 노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와 병풍인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하는 나의 노후를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알수 없는 인생을 함께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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