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시간, 아주 자잘해 보이던, 심지어 하찮아 보이던 작은 선택들이 천천히 만들어온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나를 만든 것은 어떤 '굵직굵직한 순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식하게 된다.
예컨대 죽마고우라고 믿었던 친구와 멀어지는 순간이 그렇다. 친구와 멀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절교'하는 것 같은 엄청난 사건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처럼 희미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와 멀어진다. 아주 작다고 믿었던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구렁텅이가 생겼음을 깨달았을 때, 돌아보면 어느새 친구와의 연락이 끊겨 있다.
- 그림자 여행, 정여울 -
여고시절, 내 삶의 클라이맥스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 대단한 삶이 다가오리라 확신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철없고 순진하고 무지했던 내 친구들도 그러했다. 사실관계나 논리나 일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이 되려는 어설픈 욕망과 헛된 희망과 의욕만 가득했던 우리는 함께 찬란해야만 하는 미래를 꿈꾸며 뭉쳤다. 그때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서로에 대한 의리와 우정이 남달랐다. 또한 우리의 우정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생각보다 찬란하지 않은 청춘의 시간을 의아하게 보내며 조금씩 삶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다가올 삶에도 서서히 의문이 들었으나 백마 탄 왕자의 동화를 읽고 자란 우리는 찬란할 고도를 함께 기다렸다.
차례로 결혼을 하고 사는 형편이 달라지면서 우리의 우정은 분명히 변했지만 그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찬란한 미래를 함께 꿈꾸었던 멍청했지만 순수했던 젊은 날이 사라지기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일까? 우리는 입으로만 우정을 나누고 깊은 속마음은 나누지 못했다. 꿈꾸었던 미래도, 변치 않을 것이라 여겼던 우정도 금이 간 채 막막한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이 보였다. 어쩌다 남은 의리와 우정에 기대어 속마음을 얘기해도 돌아오는 건 남보다 못한 형식적인 공감이었다. 어설픈 삶에 대한 욕망처럼 우리의 우정도 부질없는 환상임을 차곡차곡 인정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내가 알았던 친구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은 욕망에 가려 처음부터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이다. 우리 인연의 유효기간은 끝이 났다. 그 시절 함께 해준 인연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청춘은 어리석었고 어설펐다.
우정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특별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작은 것들이 쌓여서였다. 이제 기한이 다한 그들과의 인연이 아쉽기보다 젊은 날 내 어리석음이 보여서 안타깝다. 삶이 뭐 그리 대단할 것이라 착각하고 헛된 기대를 품고 쓸데없는 일에 열심히 노력했는지 안타깝다. 산다는 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해가 지는 일정한 패턴을 가진 아주 심플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잘 때 자면서 묵묵히 살아내야만 하는데 오늘을 살지 않고 내일은 뭘 할까? 내일은 어떤 좋은 일이 벌어질까? 꿈만 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를 소중히 살아내야 한다. 내일은 모른다. 그저 평소처럼 해가 뜨면 다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