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젊었을 때는 날카롭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날카로움이 무디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무딤이 아둔함이나 무감각을 의미해서는 아니 된다. 날카로움이 부분만을 본 것이라면, 무딤은 전체를 바라보는데서 생겨나는 슬기로 보아야 한다. 노자는 역시 늙은이의 사상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늙음은 젊음의 상실이 아니요, 젊음의 완성이다! 언제까지 우리 역사가 어린애 짓만을 일삼고 있겠는가?
-노자와 21세기, 도올 김용옥 -
방문
종이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방에 천사가 서 있었다.
낮은 계급으로 보이는
약간은 흔한 천사.
넌 상상도 할 수 없어, 그 천사가 말했다.
네가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
네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파랑색이 가진 만 오천 가지 색조 중
단 하나만큼도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줄 수 없어.
거대한 마젤란 성운의 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흔한 질경이 풀조차
눈에 띄지 않지만 흔적을 남기지.
나는 그의 빛나는 눈을 보고 그가 논쟁을,
긴 싸움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 기다렸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 H.M. 엔첸스베르거 -
중년의 다음 단계는 노년이다. 어떤 상태에 따라 누군가의 중년의 시간은 더 길다. 또래 중년 여자배우들은 외모에 따라 맡는 역할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같은 5,60대에도 여전히 주인공인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주인공의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는 정신의 상태에 따라 중년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 같다. 중년과 노년의 시간은 비슷하다.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두려우면 중년과 노년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고 또 한 젊은 날의 설움과 영광을 얘기하느라 정작 가족의 고민은 들을 여유가 없는 노인들, 모두들 지혜롭게 늙어가길 원하면서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중년들. 잘 늙고 잘 죽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제 웰빙이 아닌 웰 다잉 또한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중년이다. 늙지 않기 위해 몸에는 갖은 시술을 할 수 있지만 정신이 성장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보다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연한 계기로 만났던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항상 내게 존댓말을 했다. 그리고 어쩜 그리 이쁜 말씨를 가졌는지 첫 만남을 하고 내 말씨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했다. 언니가 내 남편의 소식을 접하고 열 달이 지나 지난주 친한 지인들과 함께 만났다. 급한 불을 끈 상태로 근황을 얘기하다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정말 'no more, that is enough'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집 앞에 나를 태워다 주고도 쉽게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녀는 속에 있던 깊은 위로를 건네주었고 내 가슴에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먹먹했다. 밝은 에너지를 주던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 몹시 속이 상했노라고, 다른 사람들 이제 그만 챙기고 우리 부부만을 생각하고 견뎌보라고 했다. 피붙이의 위로보다, 오래 알던 지인들이 본인들 얘기 후 예의상 건넨 호기심 어린 잠시의 위로 아닌 위로보다 그녀의 위로는 내게 가슴 저린 진심이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 동안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그녀의 성품과 지난 세월에 겪었던 삶의 풍파로 쌓인 내공이 진정한 위로로 내게 잘 전달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었던 작년 봄, 시간이 흘러도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이 난다. 한없이 자기주장이 강하고 사소한 것에도 예민했던 남편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졌을 때 뇌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했다. 나이가 들면 다 부드러워진다고 그래서 나는 내가 믿고 싶은데로 믿었다. 아직 우리에게 노년은 멀었다고 나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올이 노년은 젊음의 완성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말처럼 젊음의 완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젊음은 어느 순간 내게서 멀어져 갔고 젊은 건지 아닌지 헷갈릴 무렵에는 살아내느라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시간이 지나는 순간을 서서히 깨닫는 지금, 항상 천사를 가장하고 내 앞에서 나를 시험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것들 앞에서 나와 내 남편을 지켜야 한다. 물끄러미 다가오는 현실을 제대로 보아 그의 삶까지 지켜야 한다. 물론 준비도 되지 않았고 자신감이 넘치지도 않는다. 간절히 좋은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적 배려와 신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내야 한다. 부디 내가 잘 버티길, 가짜 천사들에게 속지 않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