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뒤에는 내가 있다.

by 천천히바람

내가 사랑한다는 걸 몰랐던 것들


1962년 3월 28일

나는 프라하와 베를린을 잇는 기차 창가에 앉아 있다.

밤이 내린다.

한 마리 지친 새처럼.

연기 자욱한 젖은 평원 위로 밤이 내리는 것을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해 질 녘을 지친 새에 비유하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 나짐 히크메트, <내가 사랑한다는 걸 몰랐던 것들> 중에서 -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중에서



10대 어느 밤, 엄마와 고속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행선지도 날짜도 기억나지 않지만 캄캄한 차장에 비친 내 모습과 밤의 신비로움과 진지하게 미래를 궁금해하는 어린 내가 떠오른다. 그 밤 나는 경건했고 이유 없이 슬펐다. 사는 것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기습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순간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밤, 비가 쏟아지는 고요한 오후, 눈이 쌓인 이른 아침에 갑자기 삶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려주었다. 봐라! 직접 너의 눈으로, 이 신비를 경건하게 느끼고 살아봐라. 나짐 히크메트 같은 위대한 시인뿐만 아니라 신은 내게도 그런 순간들을 주었다.


그 모든 대단한 순간에는 신비, 경탄과 더불어 까닭 모를 슬픔이 함께 왔다. 결국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57세에 슬픈 소풍을 마친 내 아버지, 꿋꿋하게 가정을 이끌며 살았던 엄마의 젊음과 행복도, 수도 없이 바쳤던 기도들도 하느님은 아주 나중에 나중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스스로 답을 알게 하셨다.


비가 그친 지난주 남편과 남천동에 갔다. 남편이 기억을 가진 모든 순간이 편안하길, 그리고 걱정 없이 행복하길 기도한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가보지 않은 곳을 함께 거니는 것, 천천히 그를 기다려주는 것, 그의 뒤에 내가 항상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천 성당에 도착하니 뜻밖에 미사가 봉헌 중이었다. 성찬례가 진행 중이라 나는 얼른 성체를 모시고 기도했다. 남편과 내 곁에 주님의 은총이 머물기를, 그리고 부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밖으로 나오니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당 뒷마당에 성모상이 있었다. 성모상 앞 의자에 앉자마자 서러운 눈물이 그냥 쏟아졌다. 아무도 모르게 우는 편안함이었다.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주신 이 고통 속에 항상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kbs를 지나 산 쪽으로 가면 옛 부산시장 관사가 나온다. 도모헌으로 이름 지어진 그곳에 가는 길에 떠오르는 추억들이 아련하다. kbs에서 둘이 함께 보았던 공연들, 주차장이 협소해 대기했던 그 길을 지나니 우리가 정신없이 보냈던 젊은 날이 아프게 떠올랐다. 공연을 보면 출차 걱정을 하고, 일요일이면 월요일 출근을 걱정하고, 서로가 자기의 말이 더 옳다고 격하게 싸웠던 그 모든 육체가 건강했던 순간들.


도모헌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다. 깜짝 놀랐다. 너무 추워서 오늘 겨우 마실을 나왔는데 이미 봄은 오고 있었다. 우리 앞에 희망처럼 다가오는 봄, 나이 먹은 나는 철없이 다시 설레어 본다. 올봄 둘이 손을 잡고 꽃구경을 갈 것이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어느 곳에든 나는 함께 할 것이다. 젊은 날, 우리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웠던 순간에도 꽃구경은 했다.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내다 보면 삶의 경이로운 순간이 예기치 않게 선물처럼 또다시 올 것이다. 살아 숨 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그저 묵묵히 해내면 된다. 그 경이로운 순간은 감탄사와 같이 올 것이다. 슬픔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듯 행복과 겸손한 탄성의 감사와 함께 오리라 믿는다. 그 순간을 둘만의 삶에서 전투를 함께 치러냈던 그와 함께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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