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툽 - 신의 뜻대로

by 천천히바람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들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첫눈에 반한 사랑 중에서 -


언젠가 딸이 물었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짜증 나니까 묻지 마. 어리석어서 그랬지. 집안은 꼭 봐야 하고 불쌍하다고 결혼하면 절대 절대 안 돼. 물리는 거 정말 정말 쉽지 않다. 엄마 말 잘 새겨듣고. 정말이지 너 엄마처럼 결혼하면 엄마 중환자실 갈 거야."


남편과 결혼할 때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작년에 하늘로 간 내 절친은 짜증을 내며 결혼식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제대로 눈이 멀었던 나는 친구가 오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다. 처음 해 본 연애를 그간 섭렵한 온갖 영화와 소설 속 이상에 맞춰 누가 뭐래도 잘 살아낼 줄 알았다.


1년도 되기 전에 많은 문제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내 남편이자 어머니의 남편 역할을 했다. 홀시어머니와 나이 차이 나는 남동생에게 경제적 지원은 당연하고 정서적 지원을 하며 새로운 독립된 가정이 아니라 기존 가정에 어느 집 여자를 데려와 며느리라는 굴레를 씌웠다. 21세기에 살면서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가진 채 남편은 나만 맞추길 원했다. 어느 집 그 여자의 젊음을 앗아갔던 남편의 자기 가족에 대한 경제적, 정서적 희생을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부족하다고 늘 원망했다. 지금도 그들은 남편과 나를 욕하는 힘으로 버티며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둘 만 남았다. 아픈 그는 의지할 원래 가족이 없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었다. 함께 한 소중하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없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나의 어리석음, 섣부른 동정심이 불러온 30년의 세월만이 안타깝다.


그러다 이 시를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남편과 나는 정말 젊은 날 내 동정심과 어리석음으로 결혼을 했을까? 운명이 적힌 책 속에 예사롭지 않은 우리의 만남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사롭지 않은 우리의 결혼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지금 아픈 그를 지키고자 애틋한 추억도 없는 내가 그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 절절함은 전생이든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전의 생이든 과거 분명 그에게 진 빚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 생에는 부디 갚고 싶다.


망각이라는 술을 마시고 다시 태어나 부부의 연이 이어져 우리는 다시 만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우리의 삶 또한 이제는 생로병사의 후반부로 가고 있다. 그 길에 기억나지는 않지만 운명이 슬며시 보여준 그 빚을 갚고 싶다. 내 삶의 사소한 기쁨을 포기하고 죽음 뒤에 새로운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위해 기꺼이 이 빚을 갚고 싶다. 우주에는 내가 모르는 질서와 신비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고 그냥 죽는다고, 이유도 질서도 섭리도 없다고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래도 신의 섭리와 질서와 의도를 믿는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이 시련 속에 기억나지 않는 나의 빚을 기억하고 그의 힘듦이 나로 인해 가벼워지길 오늘도 기도한다. 또한 내가 이 시간을 잘 견뎌내길 스스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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