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저마다 자기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에게 없는 것, 자기와 다른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이곳 이스탄불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내면의 애정이 관용과 화해로 개화할 수 없었던 까닭은 지금까지 인류사가 달려온 험난한 도정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이 가파른 길을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목표였건 그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 더불어 숲, 신영복 -
며칠 전 남편과 불국사를 다녀왔다. 나에게도 있었던 13살, 설레었던 첫 수학여행지가 불국사였다. 그 이후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그리 기억에 남지 않았다. 40년이 지나 남편과 가을 나들이로 다시 갔더니, 수학여행 단체사진을 찍었던 그 넓은 계단은 줄이 처져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쪽저쪽에서 반마다 사진을 찍었던 넓은 마당은 더 이상 넓지 않았다. 기억 속의 불국사는 세월과 함께 보내야겠다. 교과서에서 보던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냥 탑이었다. 별로 애틋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탑을 보니 울컥했다. 탑을 돌면서 부처님께 간절히 빌고 또 빌었을 셀 수 없는 시간 속 사람들의 간절함과 나의 간절함 때문이다. 아픈 남편과 직장을 구하는 딸과 아픈 지인들을 위해 절정의 단풍과 단체관광객의 셔터소리 속에도 개의치 않고 탑을 돌면서 기도했다. 부디 하찮은 미물인 인간이지만 심장이 쪼여드는 이 고통을 견디는 우리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불국사는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세계사에 늘 등장하는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 소피아성당은 가본 적도 없고 굳이 가보고 싶지도 않은 곳인데 신영복선생의 책을 읽으며 이곳이 왜 세계사에서 중요한지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적군의 성을 함락시키면 통상 3일간 약탈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난 다음 바로 소피아 성당으로 말을 몰아 성당 파괴를 금지시켰다.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를 파괴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다음, 이제부터는 이곳이 사원이 아니라 모스크라고 선언했다. 서구의 무슨 무슨 왕을 족보처럼 외우던 시험에 마호메트 2세는 나오지 않았는데 이 분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이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 권력을 지닌 한 인간의 지혜와 혜안이 역사와 백성의 삶을 좋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50이 넘어 교과서에서 미처 배우지 못했던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중이다. 은퇴 후에 삶은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지식은 연결고리가 있다.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가 보이고, 또 다른 하나를 이해하면 몰랐던 것이 보이기 마련이다. 육체는 노화로 늙고 쇠약하고 초라해지지만 정신의 노화는 성숙이다. 잘 무르익은 성숙은 아름답다. 가을의 단풍은 찬란함을 넘어 경건함을 가져온다. 나는 찬란함도 경건함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간절히 소박하게 초라함만 벗고 싶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면 말라비틀어져 홀로 서 있기도 버거운 나무보다 찬란한 잎이 떨어져도 다음을 기대할 수 있도록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를 돌아볼 성찰의 시간도 없이 주어진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바빴다. 부모님과 아이들 적당히 좋은 것 해주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게 살려고 부단히 숨 가쁘게 달려왔더니 이제 나를 돌아보라고 한다.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보려고 하니 타이밍이 맞지 않다. 스물에 해야 할 고민과 쉰에 해야 할 고민이 분명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놀기만 할 수는 없다. 내 이해의 폭이라도 넓혀야 타인에 대한 관용이 싹틀 것이다.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원망 없이 놓아줄 수 있는 지혜도 공부를 통해 그러려니 하고 놓아버리고 싶다.
젊은 날 진짜 내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삶에 주인공이려고 애썼다. 그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자 부질없었다. 시절인연으로 인연이 다하여 지금은 연락이 끊어져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왜 그런 사람들의 인정이 중요했는지 어리석었다. 연말 방송국 시상식을 보면 상을 받은 사람의 화려함은 하루이틀이다. 수상했다고 계속 스타로 살지 않는다. 주인공이 나이가 들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그들은 그저 과거 한 때 화려했던 작은 기억만 가질 뿐이다. 오히려 보이는 삶이 아닌 자기 삶에 충실했던 조연이 더 오래 빛나고 반갑다. 분명 내 인생은 저물어 가는 중이다. 일론 머스크도 나도 함께 저물어 가는 인생에 있다. 누가 더 아름답게 성숙해 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동일한 24시간과 돈도 권력도 필요 없는 성찰의 시간에 공평하게 서 있다. 공부를 해 보니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 많다. 노화가 성숙으로 가도록 분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