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의 기록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
하루는 24시간, 한 달은 30일, 그것이 12번 모여 1년이 되고 12년씩 5번을 살면 환갑이 된다. 어릴 땐 환갑이면 할머니가 되고 곧 죽는 줄 알았으나 수명의 연장으로 환갑은 이제 잔치도 하지 않고 경로당 출입도 하지 못하는 꼬꼬마 초보이다. 이 시기를 전후로 꼰대와 어른으로 갈라지므로 어른이 되기 위한 진정한 성장과 성숙을 준비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을 세상 중요한 과업으로 알고 살았던 시기가 드디어 끝났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나도 독립을 해야 하는 때가 왔다. 우리의 지난 20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였다. 그들만이 나의 손길을 온전히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있음으로 나도 사랑받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고 함께 서툴게 성장했다. 또한 정말 부족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독점적 지위와 권한도 가졌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성인으로 자라준 아이들도 고맙지만 부족함을 알고 고치려고 반성하고 노력했던 나 자신도 대견하고 수고했다. 롤모델도 없이 육아책만 열심히 읽어가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처음 해 본 엄마 역할을 전전긍긍하며 해내느라 지금 돌아보니 가여운 마음도 든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험과 입시에 신경이 잔뜩 곤두 썼으나 사실은 내 욕망이 더 컸음도 인정한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그들에게 특히 아들에게 푼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너라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보여주는 화풀이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여러 번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를 잘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
부모밑에서 25년, 아이들 키우느라 30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 온전히 주어진 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이 시간이 몹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잘 알고 있다. 딱히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평소에 하던 독서를 늘리고 영어 문제집을 풀고 글을 써본다. 어떤 날은 시간이 버겁다. 기간을 모르는 여명 앞에서 내게 주어진 양육의 숙제는 마친 것 같고 이제 남편과 함께 삶을 즐겨야 하는데 이것 또한 초보라 서툴고 막막하다. 지난해와 올해는 특히 힘들었지만 잘 견뎌내었다. 남편의 병세에 따라 나의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나 우리의 시간들을 포기하거나 기죽지 않고 싶다.
서툰 육아도 수십년을 하면서 결국은 보석들을 키워냈듯이 꼬꼬마 노년기도 다시 맨땅에 헤딩하듯 겁내지 말고 기죽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알면서도 사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두렵다. 세월이 만만치 않은 것을 알아버리고 나니 자꾸 기가 죽는다. 미래가 기다려지고 눈 뜬 아침이 설레기보다 아주 사소한 작은 실망에도 기가 죽는다. 그저 평범하고 무탈하기만 기도한다. 내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음을 알아버려서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 겁이 나서 피할 궁리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견뎌낼 것이다. 서서히 나를 설득하며 느린 걸음으로 제대로 익어가는 노년을 위한 성장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 화이팅!! 나에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