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성큼 가을로

by 천천히바람

로마서


행신동성당 설립 20주년

현수막에 작은 글씨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와 함께 우십시오


이천년 전 저쪽

사도 바울이 남긴 말씀

이천년 이쪽에서도

살아 있는 복음이거늘


죽어서 살아 있다

이천년 넘게

죽은 채 살아 있어서


기뻐하는 자들은

기뻐하는 자들끼리 기뻐하고

아픈 자들 또한

아픈 자들끼리 아파하고



- 이문재 시집, 혼자의 넓이 중에서 -




아픈 자들만이 아픈 자들을 이해한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아닌 어설픈 연민을 보낸다. 그것이 때로는 더 아프고 폭력적이다. 나는, 우리 집은 별일 없다는 안도감을 숨긴 채 내뱉는 의미 없는 위로들. 아픈 사람은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에 자기 아픔을 더해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설픈 말이 없어도 온몸으로 진심이 전해질 때도 있다.


길을 걷다 서서히 떨어지는 나뭇잎의 색이 노랗게 변하는 걸 보고 짧지만 분명 짧아서 더 소중한 가을이 다가오는 설렘이 일었다. 한낮 더위가 깝죽거려도 곧 물러날 마지막 발악이고 기어이 가을은 올 것이다.


우리 삶도 분명 더위와 추위는 오래간다. 상처가 덧나고 바들바들 떨면서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방황하고 나를 버리고 포기할 무렵에야 잠시 희망 비슷한 것이 던져지면 어리석게도 또 덥석 삶의 손을 잡고 신이 나를 버렸을 리가 없다고 온갖 용기를 모은다.


그럼에도 그 비굴함을 버티는 와중에도 그 힘을 주는 봄, 가을이 있어 다행이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색색으로 물든 나뭇잎을 보다 보면 내 삶도 한순간은 분명 저리 고울 것이라 다시 믿어본다. 믿음의 강도가 나이가 들수록 분명 작아지지만 부디 없어지지는 않기를.


버티고 견뎌내고 즐기고 후회하고 시행착오에 같은 실수 반복이 인생이다. 별 다른 수도 대책도 없다. 다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울 때 옆에 진심으로 있어주기, 거짓이 아니라 진실하려고 노력하기, 이런 게 소중한 삶에 필요하리라 믿으며 오늘은 가을의 희망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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