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

2024 제주정리

by 천천히바람


오래된 가구와 크고 작은 물건들이 먼지에 덮여 있었다. 사람은 죽고 없는데, 그 사람이 쓰던 것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물건들 위에 쌓인 먼지도 청소기로 훑어 없앴다.


가족이란 게 이유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가 덧붙으면 오히려 깨지기 쉬운 관계가 된다고.


- 강하고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김슬기 -



옷장을 가득 채운 옷, 냉동실 가득한 음식, 자리만 차지하는 사용하지 않는 그릇, 서랍마다 쌓인 뭔지 모를 것들, 연락도 하지 않으면서 저장된 번호, 이것들을 추억이라는 미명하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작정하고 버리려 다 혹시나 해서 다시 담긴 것들은 사실 다시 사용할 일이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다시 정리를 해야겠다. 물건들도 인간관계도.


작년 갑작스러운 건강문제로 급하게 제주도를 떠나고 집을 비워두었다. 6개월 만에 세입자를 구해서 세입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짐정리를 하러 혼자 제주도에 내려갔다. 사람이 살지 않아 환기가 되지 않은 집은 늪 같은 습도에 못 이겨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왜 중요한지 직접 겪고 나니 저절로 죽음 앞에 선 삶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내 물건을 정리해야만 한다. 자식들의 편리를 위해서,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곰팡이 묻은 곳을 청소하다 둘러보니 뭔 짐이 그리 많은지 절로 한심했다. 살면서 다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잠 오지 않는 밤 꽂힌 것들이었다. 물건은 나의 헛헛함을 채우던 수단이다가 이제는 완전한 짐이 되어 버려지고 그저 선착순으로 낯선 이에게 나눔이 되었다. 그리고 없어진 그 공간은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1층만 세를 주었기에 남은 짐은 급하게 2층으로 옮겨야 했다. 그렇게 버리고 나눔을 해도 남은 물건은 아직 많았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2층에 짐을 같이 옮길 사람을 당근으로 구했다. 한달살이 하러 온 청년이었는데 그도 나도 책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처음엔 선별을 하다 결국은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재활용센터로 책을 버리러 가고 남아서 정리하던 나는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해서 욕을 퍼부었다.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언젠가 쓸 줄 알고 버리지 못한 수많은 짐들은 추억도 아니고 그저 부끄러운 쓰레기였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돌아가야 해서 밤을 새우며 1,2층을 오르내리다 아침해가 떠올랐다. 한숨도 자지 않고 정리를 해도 무리였다. 머리가 멍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닥치는 대로 수납장이나 서랍에 쑤셔 넣는데 옆집 사시는 어르신 두 분이 오셔서 뭐 하면 될지 얘기하고 공항 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분들과의 인연이 이렇게 좋게 이어질지는 몰랐는데 내가 베푼 아주 작은 친절에 배를 돌려받았다. 서귀포의 작은 우리 마을에는 고향도 연배도 하던 일도 너무 다른 여섯 집이 서로 인사하며 살았다. 그러다 제2 공항 붐을 타고 다른 집들도 지어지며 15 가구가 되었으나 서로 데면데면했다. 집 정리를 도와준 분들은 전라도 어르신이었고 나이도 제일 많아 예전 시골의 정서를 생각하며 반상회도 하고 돌아가면서 밥도 해 먹기를 원하셨지만 찬성하는 집은 없었다. 우리는 애매하게 유리한 것만 취하는 쉰세대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강해지는 회귀본능에 따라 가난했지만 정다웠던 것으로 미화되어 기억되는 7,80년대의 마을 분위기를 그리워하였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었다. 그 노부부중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우리 부부는 병문안을 갔고 반찬을 나누었는데 그걸 늘 고마워하셨다. 그분들께 뒷정리를 마치고 10년 동안 많은 고통을 안겨준 어쩌면 기억에서 잊고 싶은 그 집을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떠났다.


아슬아슬하게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타고 결심했다. 하루에 적어도 5개는 버려야겠다고. 정 버릴 것이 없는 날은 휴대폰의 연락처와 사진이라도 지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안 곳곳을 둘러봐도 아직 여백의 미는 없다. 아직 철이 덜 든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순간이 오늘, 내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버리기를 게을리한다. 강이나 바다를 보면 마음이 평온하다. 동일한 색감의 그 넓고 짙은 푸르름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깨끗하게 비우고 버려야 마지막 순간 자연으로 잘 돌아갈 수 있다. 미리미리 여백의 미를 익히며 눈에 가시 같은 짐들을 처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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