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강에 비치는 내 모습

아버지와 큰 고모를 추억하며

by 천천히바람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 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이고, 만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속절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 견디기보다 몸 가볍게 달아나며 마법구두를 신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살았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의미 있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


-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



돌아가신 아버지는 1941년 지금은 호미곶으로 유명해진 그 동네 부근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의 세 형들 중 한 분은 일본순사가 있는 파출소를 습격하다 돌아가시고, 한 분은 아들 하나, 딸 셋,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쌍둥이를 남겨둔 채 돌아가셨다. 쌍둥이 언니들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올해 언니들의 엄마가 98세로 돌아가셔서 산소에 잘 모신 후 내려오는 길에 큰 오빠가 아버지를 이쯤에서 어린 내가 뿌렸다고 하자 언니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맨바닥에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제는 칠순을 넘었지만 당시에는 어린 상주였던 장남의 그 기억도 그 자리에서 덥석 절을 올린 언니들도 지난 세월 살아내면서 감내했던 고통이 이제는 무뎌지고 치유되길 기원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큰아버지는 장남 한 분이셨다. 큰아버지는 고깃배를 하시며 집안의 재산을 많이 탕진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장남의 경상북도 시골에서 장남의 지위는 상당했으니 지금까지 집안의 재산이나 분배에 대한 얘기는 궁금해하거나 들어본 적도 없다. 아버지에게는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 나이 차 많은 큰 누나는 아버지를 거의 엄마처럼 키우며 아버지를 업고 국민학교에 다니시다 선생님에게 쫓겨나 졸업을 못하셨다고 한다. 몇 안 되는 살아있는 천사 중 한 분인 우리 고모는 올해 아흔다섯인데 기억도 총명하시고 무엇보다 다리가 건강하셔서 잘 걸으신다. 고모가 천사인 이유는 가진 것에 따라 입은 행색에 따라 사람을 달리 보는 눈이 아예 없으시다는 것이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은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마음만 가진 참으로 고운 분이시다.


엄마 같던 큰 누나가 시집을 가는 줄도 모르고 학교에 갔던 아버지는 하굣길에 고모가 탄 꽃가마를 발견하고 그대로 가마 옆에서 고모를 따라갔단다. 그때가 아버지는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는데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으니 그대로 따라갔다고 한다. 고모는 꽃가마 안에서 빨리 집에 가라고 계속 재촉했지만 아버지는 사돈집까지 가서 거한 한 상을 받아 드시고 꼬마사돈 이제 집에 가야 한다는 여러 명의 설득에 마지못해 달빛 속에 집으로 돌아갔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아버지는 해주셨다.


장남인 큰아버지는 본인의 입이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 아들 딸 차별이 심하고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 욕심 많은 분이셨고 큰고모는 내가 느끼기에도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미담이 자자한 분이시다. 우리 아버지는 건강과 재물운을 빼면 참 좋은 분이신데 건강과 재물이 없으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된지 굳이 글로 쓸 이유가 없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 큰 고모의 꿈에 나타나 봇짐을 지고 웃으며 '누부야, 내 간데이' 라고 하셨다고 한다. 처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누나의 꿈에 나타나 마지막 인사를 전한 아버지와 산소 흙바닥에서 내형제를 부르며 슬피 우시는 고모를 보고 집안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형제애를 보았다. 늘 좋아했던 나의 고모이지만 그 이후 고모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다. 미처 내 아버지가 다 전하지 못한 고마움을 나라도 전해야 할 것 같은 그 가벼운 빚진 마음이다. 고모의 딸들인 사촌언니들과 연락하며 지내는데 언니들도 외삼촌 하면 우리 아버지만 떠오른다고 했다. 많은 형제 중에 유독 각별했던 두 분, 살아계신 고모의 모습을 보며 나의 오지랖의 한 부분이 아버지와 고모를 걸쳐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95세인 고모는 지금도 내 아들의 이름을 아신다. 나는 그것이 몹시도 신기하다. 마음으로 깊은 사랑을 받는 느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아버지의 세대는 이제 큰고모와 막내인 작은 아버지, 그리고 엄마 세 분이 남았다. 젊은 날 엄마의 고생담은 날이 갈수록 생생해지는데 나는 그런 엄마에게 '진정한 위너는 엄마야, 다들 돌아가셨잖아'라고 얘기한다. 지난 시절 서러움도 미움도 정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다들 백세시대로 오래 살 것이라 착각하지만 환갑도 못 넘긴 분들도 많다. 그러고 보면 유전자가 중요한 건 맞지만 환경의 영향도 무시는 못함을 느낀다. 살아있는 동안 그저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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