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자의 특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
건강하게 적당히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 어느 햇살 좋은 행복한 날 꿈처럼 세상과 이별하고 싶은 언강생심 어려운 꿈을 간절히 소망한다. 병원신세 오래 지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친구들과 엇비슷하게 하늘로 떠나 그곳에서 걱정과 불안 없이 제대로 행복하게 놀고 싶다.
어릴 적부터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병약한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혹시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아침마다 엄마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유년시절 공포였던 부모의 죽음에 대한 공포의 원인과 그것이 삶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직면해야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범한 듯 보이지만 실은 사소한 일에도 걱정이 많다. 겉으로 쿨해 보이고 싶은 욕망은 사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고 남들에게 내 어려운 사정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아버지 집안에는 예전엔 폐병이라 불리던 폐결핵 환자가 있었고 아버지에게도 전염되었다. 그 당시는 전염병에 대한 대처가 미흡해 음식을 따로 먹거나 하지 않았다. 병이 옮은 아버지는 제대로 된 진단이나 치료 없이 약국에서 새로 나온 약을 스스로 사서 복용하셨고 이후엔 모든 약에 내성이 생겨 가래가 끓고 숨이 가빠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폭음까지 하셨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어느 날 부산에 사시는 둘째 고모와 숙모가 와서 아버지를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셨고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가셨다. 오빠와 나는 이모집에 있었는데 엄마가 무척 그리웠으나 건강해진 아버지와 엄마가 돌아올 걸 믿고 기다렸다. 엄마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일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호흡도 좋아지고 평소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의사 선생님도 치료를 계속하겠다고 하셨으나 병원비가 생각보다 아주 비싸다는 말에 고모와 숙모는 치료비 걱정에 천주교에서 하는 무료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입원시켰다. 아버지의 병세는 다시 나빠졌다. 그 후 치료 적기를 놓친 아버지는 다시는 그때의 좋은 컨디션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늘 숨이 가쁘고 아침마다 가래를 뱉어야 하는 세월을 보내다 결국 57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컨디션을 좋게 해 준 병원의 그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다고 애절하게 말씀하셨다는데 돈이 없던 엄마는 방법이 없었다. 염치 불구하고 고모와 숙모에게 매달리지도 못하고 요양원에 아버지를 홀로 두고 돌아섰다. 삼십 대의 젊은 엄마는 목련꽃이 핀 요양원에 낯가림이 심한 아버지를 홀로 두고 내년 목련이 필 때는 몸이 나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얼마나 서럽게 우셨는지 버스 기사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다음 해 목련이 피어도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 후 다른 요양원으로 가셨다. 대구의 다른 가톨릭 요양원으로 향하는 배웅은 어린 오빠와 내가 공장에 간 엄마를 대신해서 하였다. 보호자가 뒤바뀐 셈이다. 아버지 때문에 서럽게 울던 삼십 대의 엄마는 삶의 고난과 무게로 사소한 일에도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었다. 아버지와 우리 남매는 엄마의 화가 제일 무서웠다. 엄마의 삶의 무게를 나눠줄 어른은 물론 없었지만 어떨 땐 정도가 과했다. 연민과 애절함은 화로 표출되었고 고작 명절에만 집에 며칠 다녀가는 아버지는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가장의 역할을 엄마에게 떠넘긴 죄로 그 짜증을 받아내었다. 그 기억이 내게는 참 아프다.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조금만 다스리면 행복한 며칠을 함께 보낼 수 있는데 엄마는 늘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편이 되었고 심부름을 도맡아 했지만 엄마는 어지간한 일에는 아버지와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가 시가 쪽의 형제들과 시누들에 대한 원망을 쏟으면 아버지는 그만하라고 하셨고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가를 간 오빠는 장인, 장모가 젊다. 어느 날 엄마는 남편이 없다고 사돈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참 의아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없는 게 낫다고 하던 분이 그런 얘기를 하니 이상하기만 했다. 오빠는 아버지 제사를 극진히 모시지만 나는 죽고 난 뒤의 극진한 제사보다 살아서 행복한 한 순간이 낫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오기 전 아버지와 도란도란 얘기하던 그날들, 언젠가 요양원에서 단식을 권유해서 잠시 아버지의 호흡이 좋아졌다. 단식으로 몸의 영양분이 없어 병균을 죽게 하는 실험적인 시도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짧은 호흡이 좋아진 순간에 오빠와 나와 아버지는 처음으로 동네 뒷산을 올랐다. 아버지가 회복되기를 늘 기도했으나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의 기저에는 아버지가 낫기는 힘들 것 같다는 불안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본인이 원하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었다. 건강하지 못하니 돈을 벌 수 없었고 돈이 없으니 원치 않는 단체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절에 집에 다니러 오시면 늘 요양원이 아닌 조용한 집에 혼자 살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커서 돈을 많이 벌면 그 소원은 꼭 들어드려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들어줄 수 있는 소원도 그때는 돈이 없어 어찌할 수 없었다. 환자인 아버지가 제일 불쌍하고 가장의 무게를 홀로 견뎌야 했던 엄마도 물론 안쓰럽다.
하지만 그 사이의 자식들, 즉 나와 오빠 또한 문제가 생긴다. 철이 빨리 든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떼를 써보거나 무엇을 사달라고 요구하거나 부모를 걱정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들어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보고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부모가 없으니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가 함께 있어도 항상 싸울까 불안했다. 내 감정이나 생각을 들여다 볼 생각보다 아픈 아버지와 바쁜 엄마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금도 주는 것이 편하지 받는 것은 불편하다. 가만히 있는 것도 불편하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성공을 해서 내가 아닌 부모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내 삶의 궁극적 목표가 나의 행복이 아닌 부모의 행복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도 애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부모란 자식을 위해 뭔가를 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와 함께만 있어도 행복해하는 내 아이들 얼굴 위로 서서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나 버린 부모에 대한 애정욕구는 다시 채울 수도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된 내가 나를 포기하면 직무유기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몹시 사랑하려고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살아가는 자의 특권으로 스스로를 챙길 예정인데 물론 쉽지 않다. 오래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젊은 날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은 내려놓을 것이다. 그분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어린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었기 때문에 나는 당당히 내 삶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