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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Sep 12. 2023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7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반추하는 건 주로 사랑받은 기억입니다. 문명과는 동떨이진, 농사짓고 길쌈하고 호롱불 켜고 바느질하고 사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지요.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 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른 새벽잠 달아난 늙은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줍니다.


부자가 되거나 권세를 잡거나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듯이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습니다. 나이 먹어 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 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았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일, 매일매일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 쾌적하고 정갈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일, 아이들 공부를 돌보고 가끔 학교 출입을 하는 일, 뜨개질, 옷 만들기 - 소위 살림이라 불리는 이런 일들을 나는 잘했고, 또 좋아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허한 구석을 나는 내 내부에 갖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날 온종일, 어디서 소포 뭉치가 되어 뒹굴고 있을 내 작품에 대한 육친애와도 방불한 짙은 연민으로 거의 흐느낄 것 같았다. 나는 또 내 원고를 딴 소포들과 함께 마구 천대할 우체국 직원을 가상하고 앙심을 품기까지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 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박완서작가님의 중년과 노년의 삶은 따뜻한 일몰을 보는 것 같다. 묘하게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가슴이 저민다. 대작가의 삶과 내 삶이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가족을 위해 집안일을 하는 스스로가 대견하였다. 또한 아무리 집안이 반들반들해도 어찌할 수 없는 내면의 허기를 나 또한 느꼈다.


인생의 일몰과 가을은 삶이 아름답게 소멸하는 방법을, 손자를 향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행복해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며, 유년시절 사랑받은 기억이 노년의 새벽을 어떻게 꽉 채우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노을이 어둠과 함께 세상을 흐릿하게 해 주는 일몰이 좋다. 자세히 보이지 않으니 더럽고 모난 부분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열심히 살아내는 것 보다 사소하게 행복하고 싶다. 열심히는 충분하다. 연어처럼 힘들게 힘들게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향에 가는 것보다 지금 내가 숨쉬고 있는 곳에서 누군가에 베풀어 준 것도 내가 갚아야 할 것도  잊고 소소하게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소소하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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