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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Oct 21. 2023

Living in Jeju 3

가을을 품은 하늘


추석 전후 한 달을 부산에 가서 차례 지내고 친구들 만나서 실컷 놀다가 왔다. 정말 오랫동안 책 한번 보지 않고 놀았다. 실컷 놀고 나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쉬움 없이 실컷 놀아봐야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을 한다는 말을 이해하고 돌아왔다.


제주, 특히 서귀포시 면소재지에 사는  나는 도시의 대형 마트만 보아도 설레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 마트가 눈앞에 있자 마음이 막 설레었다. 커피숍이 줄지어 있고 백화점이 있고 병원 간판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지나면서 마치 유럽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건물을 살펴보았다.


일주일을 신나고 바쁘고 즐겁게 보냈다. 책 볼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에도 끝은 있는 법. 서서히 지쳤다. 인간과의 대화는 나눌 때는 몹시 흥겹지만 돌아서면 무엇인가 허전하다. 삶에 본질과 나 자신에 충실하지 못한 그런 느낌.


제주에 돌아오자마자 집을 정리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천천히 하자고 한꺼번에 다해서 겨우 진정된 손가락 관절염을 도지게 하지 말자고. 첫날은 집안을 둘째 날은 마당의 거미줄을 세쨋날은 텃밭의 풀들을 조금씩 뽑았다. 한꺼번에 다하려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 성급한 마음은 정신이 가난한 자들의 습성이라고 되뇌었다. 아들이 신호등이 깜빡이는데도 굳이 길을 건너는 할머니들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하였다. 직장에 지각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위험하게 깜빡이는 불을 보고도 급하게 건너냐고. 저러다 다치면 얼마나 큰 일이냐고 했다.


아들아, 그건 몸이 기억하는 가난이다. 젊었을 때 단지 본인의 손으로만 집안일과 육아를 하며 차도 없이 장 보러 다니다 보면 하루가 얼마나 바빴겠냐. 그래서 몸과 마음이 그걸 기억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게. 그래도 성장이라는 걸 해야 책 읽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니. 천천히 느리게 그것이 제주에 와서 허리와 손가락에 병을 얻고 깊이 깨우친 것이다. 내 몸은 늙어가는 중인데 내 머리가 설마 하다가 몸에 탈이 나고서야 늙어감을 인정하는 중인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엄마는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까. 아니면 철들어 가는 중이거나.


제주의 가을은 하늘이 다 했다. 꽃도 국화의 향도 댑싸리의 오묘한 색도 아닌 제주의 하늘이 나에게 슬며시 알려줬다. 너 도시 가서 실컷 놀아봤자 나 한 번 보는 게 낫지? 하며 씩 웃는 것 같다. 얼마나 푸르고 구름이 오묘한지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다. 백문이불여일견 2023 신상의 제주 가을 하늘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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