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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Dec 14. 2023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16

마음의 서재 - 정여울

우리가 어떤 일에 푹 빠져 있을 때, 무언가 똑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우리의 지친 어깨를
다독이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뮤즈Muse'라고도 불렀고, '지니어스Genius'라고도 불렀다.


흔히들 천재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지니어스는 원래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재능과 창의성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서 분리된 창조성의 혼, 지니어스 요정의 힘이라 믿었다. 예술가의 스튜디오 벽 안에 숨어 사는 마술적이고 신성한 혼의 이름, 그것이 지니어스였다. 예술가가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벽에서 몰래 나와 우렁각시처럼 감쪽같이 예술가를 도와준 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마술적인 정령, 그것이 지니어스였던 것이다.


위대한 재능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생각했던 이 지혜로운 믿음이 과도한 자아도취로부터 예술가들을 보호해 주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 나와도 '지니어스 탓'이고,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이 나와도 지니어스 탓'이니, 예술가들은 자아도취에도 자기혐오에도 빠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개인의 소유물이 된 것은 '모든 건 인간 탓'이라 믿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개인을 우주의 중심에 놓게 된 이후 인간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재능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라는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빨리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종 학원으로 아이들을 출근시킨다. 조기교육, 조기유학, 조기졸업... 모든 것을 '조기'에 해결하려고 하는 이 재능의 속성재배 시대. 사람들은 지니어스 요정의 축복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지니어스를 내면화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능은 마치 한정된 자원처럼 취급되고, 창작은 재능을 소모하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가 노먼 메일러Noman Mailer조차도 "내가 쓴 책은 모두 조금씩 나를 살해했다"고 고백했을까. 재능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아역 스타로 전 세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 성인이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슬럼프에 시달리고, 스포츠 스타로 각광받던 선수들이 선수 생활이 끝나면 '삶의 기술'을 몰라 고통받는 일이 많다. 이것은 재능을 개발하느라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능을 위해 삶을 '올인'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상이다.


고대 그리스어에 '파르마콘pharmakon' 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움이 되는 것이자 동시에 방해가 되는 것', '치료이자 독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인간이 문자 기록에 의지하면서 점점 기억력이 쇠퇴하고,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번호를 외우는 능력이 저하된 것처럼 말이다. 재능의 달콤한 축복뿐 아니라 재능의 치명적인 독성도 가르쳐주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 아닐까. 재능을 개발한답시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빼앗지 않는 것이 부모의 지혜 아닐까. 재능은 '사람'을 빛나게 해주지만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마이클 잭슨은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노래와 춤의 달인이었지만, 그렇게도 되찾고 싶었던 '행복한 어린 시절'을 이 세상 어디서도 돌려받지 못해 평생 고통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 한 방'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재능=직업=인생'이리는 위험한 도식이 자리 잡고 있다.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만 모두가 재능에 안성맞춤인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직업은 물론 중요하지만 직업이라는 테마로 인생의 거대한 벽화를 모두 채울 수는 없다. 재능은 삶의 토양의 비료'는 될 수 있어도 '흙'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어떤 효과 빠른 재능의 비료도 사랑이라는 물과 우정이라는 태양 없이는 삶이라는 나무를 키우지 못한다. 재능은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하지만 재능은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열정은 진심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재능보다 크고 성공보다 깊다.



나무마다 열매가 가득히 맺힌 마당은 비가 내리고 내 하루는 정여울의 책으로 가슴이 촉촉해지는 하루다.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나의 생각과 같은 글을 쓰다니 정여울 작가가 몹시 마음에 든다. 재능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훌륭하지만 나는 삶의 속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좋다. 빨리 성공해서 빨리 부자가 된다. 그리고 나서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유년시절에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다음 단계의 성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 편이다. 나이가 들수록 급한 성격을 더 확실히 깨닫는다. 급한 성격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빨리빨리를 강요한다. 천천히, 차분히라는 단어를 속 터지게 생각한다. 뭐든 빨리빨리 해놓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천천히 즐기는 것이 어려웠다. 예를 들면, 밥을 차리면서 설거지 걱정을 했고 은행과 병원에서는 번호표를 빨리 뽑아서 1분이라도 적게 기다려야 마음이 편했다.


이제야 돌아보니 빨리빨리에 대한 나의 변명거리도 분명 있다. 할 일은 많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변변치 않았으니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붙들고 혼자 동동거렸다. 직장에 육아에 집안일에 해도 해도 끝없는 일만 있었으니 천천히 대화하며 나긋나긋하게 밥을 먹고 차 마시고 과일 먹고 할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엔 해야 할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쉬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히 바닥난 체력을 보충하고 위로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서둘러야 했나 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몸이 고달팠다. 너무나 많은 여유가 생긴 지금도 천천히 무엇인가를 하려 해도 너무나 어렵다. 말도 빠르고 기다리는 것도, 일을 미뤄두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다. 내 몸이 성급함에 길들여진 것이다.


'5분 일찍 가려다가 몇 십년 일찍간다'라는 말이 있다. 급하게 차를 몰다 보면 사고가 난다는 얘기다. 굳이 마이클 잭슨이나 아역배우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성급함과 조급함에 대한 결과는 좋지 않음을 삶이 나에게 잘 가르쳐 주었다. 느린 삶의 속도에 대한 자각이 들자 말을 천천히 하려고 노력 중이다. 음식도 천천히 먹고자 노력 중이다. 자각과 노력이 없으면 수 십년 길들여진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빠릿빠릿함을 버리고 이제는 천천히 고상하고 여유로운 삶의 속도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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