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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Mar 01. 2022

13. 냉장고 속 재료들이 죽어간다. (2) 감자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ab32267baa19499/12

 어느 평일 저녁날, 열심히 사과를 처치해서 어쩐지 자신감이 붙었던 요 자취생은, 빨간 날을 맞이하야 이번에는 감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늘도 식재료 출처는 회사에서 저녁 대신 받아 왔던 삶은 감자...인 줄 알았던 구운 감자. 평소에 자주 받던 메뉴가 아니었던지라(커리 만들 때나 한 번씩 받아서 툭툭 썰어 넣었었다), 구운 건줄도 모르고 삶은 감자 레시피를 찾고 있자니 언니가 지나가던 말로 그거 구운 감자던데, 라고 말해 줘서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구운 감자 레시피...는 애초에 별로 뜨지도 않고, 맘에 드는 것도 잘 없었다. 음, 그래서 어차피 내가 먹을 거니까- 하고 삶은 감자 레시피 두어 가지를 찾아 왔다.


 감자 스프, 치즈 감자전, 감자 그라탕... 열심히 레시피를 찾다가, 그래도 뭔가 씹고 싶어서 감자전을 선택하고 만들어보자니, 햄도 없고 치즈도 영 모자라다. 급하게 선회하여 뭐든 있는 걸로 될 것 같은 그라탕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본 레시피를 보고 시작했던 것 같은데, 으깨기만 하고 뻗어서 자고 일어나 마저 했기 때문에 창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재료가 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나는 치즈, 양파, 감자 밖에 없어서 다른 건 쓰지 않았다.


1. 감자를 으깬다.
2. 으깬 감자를 그라탕 그릇에 얇게 깔고, 우유를 좀 붓고 스파게티 소스랑 섞는다.
3. 양파를 볶아서 (소금 살짝) 그 위에 얹고, 소스를 조금 더 올린 뒤 치즈를 뿌린다.
4. 오븐 160도에 15분 정도. 예열을 하지 않아서 그냥 예열과정 포함 한 번에 넣었다.

 시작은 달-콤하게 평-범하게 나에게 끌려, 흥얼거리면서 시작한 요 작업이 생각보다 중노동일 줄 몰랐다. 처음에 레시피 스크랩을 친구와의 카톡방에서(계란후라이를 잘 하는 그 친구!) 하다가, 친구가 '감자는 삶자마자 으깨야 잘 되지 않나?'라는 말을 했지만, 요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그 말을 대충 지나가 버렸다. 일단 껍질을 까고, 대충 꾹꾹 누르면 으깨질 줄 알았는데, 박살도 잘 나지 않았다. 오키오키 전자렌지. 그치만 더 마를까봐 물을 조금... 붓고 돌려 봤다. 데워진 부분이 조금 더 으깨지지만 얼마 가지 않는다. 오키오키 또 전자렌지! 를 한 서너번 반복했던 것 같다. 맙소사, 힘들다 했더니 친구와의 대화를 보니 거의 한 시간을 으깨기만 한 것 같다. 그라탕 그릇에 넉넉하게 펼쳐 놓고, 남은 건 얼렸다. 뭐라도 되겠지. 피곤해서 그릇에 랩을 씌우고 자고 일어나서 작업 재개!

 1번 으깨기가 미친듯이 힘들어서 그렇지 2번 이후는 어렵진 않았다. 양파 볶는 것 말고는 거의 작업량이 없었는데, 올리다 보니 너무 단조로워 보이나 싶어서 설 전에 만들어 보았던 선드라이토마토 남은 걸 탈탈 털어 넣었다(그래서 마지막에 올리브유들 때문에 기름이 어마어마해졌다). 치즈감자전을 포기하게 된 원인이었던 피자치즈도 두어숟갈쯤 남은 것을 탈탈, 저번에 먹다 만 하바티 치즈 두 장까지 야무지게 찢어서 올렸더니 그럭저럭 그라탕 비주얼이 됐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으로 만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씹는 맛이 없어서인지 기름이 많아서인지 약간 아쉽긴 했지만, 퍼석퍼석한 회사 감자로 만든 것 치고는 꽤나 괜찮은 밥상이었다. 게임하러 왔던 친구랑 닌텐도를 깨면서 둘이 젓가락도 없이 수저로만 잘 퍼서 먹었다.

배고파서 한 입 뜨고나서 아차 하고 찍은 사진. 치즈가 다 한 그라탕!

 피드백. 다음에 만든다면 달달하게 스위트콘도 좀 넣고 고기도 조금 더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고기는... 아직 내 손으로 만져볼 용기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닭가슴살 소시지라도 좀 잘라 넣을 것을 그랬다. 그치만 게임 중이었던 것치고는 양파도 넣어서 나름 요리스러웠다! 썬드라이토마토에서 올리브유만 좀 덜 넣어도 충분히 더 괜찮았을 것 같긴 하다. 가끔 회사에서 가져와서 한 시간 노가다를 뛰고... 먹을 만한 메뉴인가는 살짝 고민해봐야겠지만, 아직 감자 삶는 법을 배우지 못 했으니 이 정도로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다 떨어진 피자치즈는 식사 후 산책 삼아 다시 사오기까지 했으므로 매우 부지런한 빨간 날을 보낼 수 있었다. 간 김에 세일하는 우유까지 샀으니, 다음 주 양식으로 그릭 요거트도 새로 작업해야겠다.


 번외로, 썬드라이 토마토는 회사에서 자주 나오는 사이드인 방울토마토를 며칠 모아서 만드는 친구인데, 손은 많이 가지만 간을 맞출 필요는 없어서 맛이 썩 그럴 듯하다. 인터넷에 오븐으로 만드는 방법이 많이 나와 있긴 한데, 정말 썬으로 드라이 하는 건 찾아도 찾아도 없더라(나중에 구글링해서 봤더니 약간 태양초 고추 만드는 느낌이긴 했다). 대충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방울토마토를 반 잘라 소금을 뿌려 두고, 30분 정도 체에 받쳐 물기를 뺀다(혹은 키친타올).
2. 오븐 판에 넓게 하나씩 올리고(붙으면 안 된다), 후추를 갈갈갈
3. 150도 10분 돌리고 10분 식히기(겨울이라 베란다 이용)
4. 자리를 한 번씩 오븐 판에서 떼어 준 뒤, 140도 10분 돌리고 10분 식히기
5. 자리를 한 번씩 판에서 떼어 준 뒤, 130도 20분 돌리고 10분 식히기 (물기가 많으면 적당히 추가)
6. 편마늘, 페퍼론치노, 로즈마리 등등과 함께 병에 넣고, 올리브유를 붓는다.
7. 바로 먹을 거면 실온 보관, 조금 뒤에 먹을 거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사용!

 길어 보이지만 재택 중에 알람 맞춰놓고 판만 베란다 왔다갔다 두어 번 하면 끝나는 작업이다. 하면서 잘 말랐나, 하고 한 입씩 먹다 보면 한 줄이 사라지는 마법도 볼 수 있다. 안주로도 좋고, 빵에 살짝 얹어도 좋은데, 특히 친구가 전에 놀러오면서 사 왔던 마늘 바게트에 얹어 먹었을 때 조화가 엄청났다. 요리에 써 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좀 더 찾아봐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으으 어려운 식생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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