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시작한 이후 내가 관심을 가져 온 식재료라고는 자취생의 친구인 햇반과 컵라면, 만두뿐이었다. 아니다, 만두는 사실 좀 넘어도 냉동이라는 핑계로 그냥 먹었으니까 햇반이랑 컵라면 정도인 것 같다. 굳이 더한다면 회사에서 식사 대신 과일이나 빵을 가져올 수 있어서, 그걸 챙겨 왔을 경우 죽이지 않기... 정도?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평소에는 일하다 틈틈이 보는 게 소설이나 네일아트 디자인, SNS 정도였다면 뭔가 뭐라도 먹을 것에 대한 걸 찾기 시작하게 됐다. 주객전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삼일에 한 번은 글을 계속 쓰려면 뭐라도 계속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사실 집에서 밥 먹을 시간도 거의 없는 데다, 할 줄 아는 것이 일천하다 보니 한참 찾아서 하나 해 먹고, 한참 찾아서 하나 해 먹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글을 봐도 알겠지만 도시락 삼아 들고다닐 수 있는 그릭요거트를 즐기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주로 요거트볼을 해 먹었더니, 집에 과일을 열심히 챙겨 왔는데, 이게 한 번에 다 먹지 못하다 보니 종류별로 가져 온 과일들이 서로 다른 재고량을 뽐내는 것이었다. 또다른 문제는, 요거트 말고도 주 1회 정도는 챙겨 먹는 밥 때문에 사다 놓은 식재료들이 점점 죽어가는 것이었다. 두 식단 사이에 호환되는 재료는 없었다. 사실 후자 쪽이 더 문제다. 과일은 정 안되면 그냥 먹기라도 하면 되는데, 채소는... 채소는 어디다 써야 하는 것인가. 양파는 어디다 쓰지? 당근 남은 반쪽은 언제까지 둘 수 있지? 저 남은 버섯은 도대체 뭘 해야 하는가. 구운 감자 남은 건? 남은 고구마랑 단호박은? 으아아아.
그 와중에 야근 시즌 도입으로 재택마저 없어져서, 이제 진짜 작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왔다. 일단 다음 주에 삼일절이 있으니 본가는 그 때 가고, 주말을 본가 대신 집에서 보내 보기로 하고, 본격 냉장고 파먹기...가 아니라 냉장고 속 재료 구출하기 대작전을 펼쳐 보기로 했다.
1) 애플 시나몬맛 그릭 요거트
첫 번째 타자는 색이 아슬아슬해 보이는 사과 몇 조각이었다. 전에 동네 그릭 요거트집에서 사 먹은 생딸기 플레이버드 그릭 요거트가 생각 나서 만들어봤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플레이버드 그릭 요거트(이걸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는 레시피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게 약간 카페 비결 같은 느낌으로, 원데이 클래스나 창업반 강의 같은 것만 보였다. 그래도 구글도 뒤지고 남의 인스타 탐색도 좀 하다 보니, 대체로 퓨레를 만들어서 섞는 느낌이었다. 좋아, 그럼 사과 퓨레를 만들자! 하고 레시피를 찾아 보니 예상 외로 사과 퓨레는 초기 이유식이라는 단어랑 같이 가는 느낌이었다. 원하던... 뭔가 과일향 가득 그런 디저트 느낌의 레시피보다는 굉장히 아가들을 위한 (찹쌀풀도 들어가고 하는) 식사 스러운 레시피만 나와서, 그냥 레시피 없이 요거트볼을 쉽게 만들자는 느낌으로 접근해봤다.
다지기 기계로 사과를 편하게 작게 다지기(귀찮아서 껍질 포함)
시나몬 가루, 꿀 한 스푼과 함께 그릭 요거트와 열심히 섞기
목록으로 작성하기 무색하게 고작 두 줄이라니. 그만큼 쉽긴 했다. 아무튼 퇴근하고 한 밤 중에 들인 유일한 공수였는데, 오 맛있다. 이거 맛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과에서 물기가 나와서 요거트의 꾸덕함이 조금 줄어든다는 점이었지만, 그렇다고 사과에서 물기를 또 뺄 정도로는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언니는 시나몬을 좋아하지 않아서 맛을 보게 하진 않았지만, 꿀이랑 조합이 엄청났다. 조금 더 다져서 만들면 베이글에 발라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비주얼은... 이름 그대로의 비주얼이긴 한데 정말 맛있다. 2) 허니 애플 시나몬 라떼
다진 사과 남은 반절은 덜어놨다가, 한 번 더 해 먹거나 다른 걸 만들어볼까 하고 일단 냉장고에 넣어 두고, 또 업무 중 쉬는 시간 틈틈이 써먹을 방도를 검색해봤다. 대충 잘 다져 놓은 사과는 전자레인지로 사과청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오 괜찮은데? 애플 시나몬청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이건 좀 더 액체 느낌이긴 했다). 오 이것도 괜찮은데? 근데 청 만들면 뭐에 쓰는 거지... 했더니 애플 시나몬 라떼라는 걸 만드는 분이 있었다! 이름부터 아주 아름다운 것이, 이거다 싶었다. 그치만 레시피는 이번에도 내 맘대로.
다지기 기계로 사과를 편하게 작게 다지기(남은 절반 사용)
설탕이나 꿀, 시나몬 가루를 넣고 전자레인지에서 적당히 쪼그라들 때까지 돌리기(30초씩 보면서 여러 번)
자작해지면 컵 바닥에 넣고 식혔다가 냉장고에 넣기
손님 오기 직전에 꿀 한 스푼 넣고 우유를 거품내어 같이 섞기
시나몬 가루를 뿌려 내 오기
예쁜 홈카페 잔은 없지만 맥주잔은 많은 우리집. 피드백. 나는 아이스를 좋아하는 손님용으로 냉장고에 넣었지만, 따뜻하게 먹는 게 더 맛있을 것 같긴 했다. 음료에 어차피 꿀을 넣을 거니까 꿀도 별로 안 넣고 만들긴 했는데, 두 번 간을 맞출 게 아니라면 청 처럼 좀 더 달달하게 만들어 두는 게 편하긴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요거트 때와는 달리 라떼로 먹을 때는 좀 더 돌려서 노골노골해진 다음에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오, 우유 거품 내는 걸 설명하려고 글을 찾다가 보니, 포크로 좀 으깨서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우유 거품은 전에 부서에서 바리스타 원데이 클래스 가서 배웠던 프렌치프레소로 거품내기를 써 먹었다. 프렌치프레소에 우유를 반쯤 넣고 위아래로 펌핑하면 거품이 생기는 건데, 영상이 쉬울 것 같아서 설명용 글은 블로그 글을 하나 찾아왔다. 선생님도 스팀기 없으실 땐 이게 제일 예쁘고 간편하게 된다고 하셨어서 다이소에서 삼천원 주고 사왔었다(굳이 큰건 아니어도 된다). 팁이 있다면, 우유가 차가울수록 거품이 크고 풍성하게 나온다. 물론 따뜻해도 조금 손이 더 갈 뿐이지 잘 된다. 아몬드브리즈나 두유도 좀 약하긴 해도 되기는 하고, 예전에 할머니 타 드리면서 믹스커피로도 했었다. 주의할 점은, 프렌치프레소는 수세미를 사용해서 설거지하면 안 되고, 하더라도 천 수세미 약한 걸로 해야하기 때문에 정말 사용하자마자 컵에 따르고 즉시! 설거지를 해야 한다. 벌써 한 2년쯤 쓰는 것 같은데 잘 쓰고 있는 멋진 아이템이다.
여차저차, 남은 사과를 처치 완료! 그것도 꽤나 그럴 듯한 홈카페 느낌으로 해결해서 뿌듯했는데, 위에 딸기우유 만드신 분이 참 사진도 컵도 예쁘게 잘 두신 것 같아서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손님 왔을때 호다닥 내오기 좋은 메뉴를 새로 마련한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