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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Feb 25. 2022

11.요리할 힘조차 할부로, 그릭 요거트.

서른 살, 밥은 해먹고 살 수 있을까?

 우리 부서는 대충 주 1회 재택이다. 근데 워낙 다들 휴가로 알고(재택이면 보고서도 전날 미리 쓰고 가라고 한다ㅋㅋㅋㅋㅋ), 상사들이 워낙 못마땅해 하는 티를 내 대서, 이번 주에도 재택을 하지 못했다. 일이 많은 시즌이다. 아마 다음 주도 회사의 큰 모니터로도 부족한 작업을 해야 해서 재택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어제도 퇴근하고 대충 냉동 피자를 돌려 먹은 뒤 거실에 널부러져서, 1시간 넘게 회복한 뒤에나 설거지를 할 힘이 났다. 두어 달은 이렇게 바쁠 텐데,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몸에 불청객-근종과 결절-이 생겨서인지 체력이 끔찍하다. 이미 회사에 도착했지만 회사 가기 싫다.




지난 글에서 잘 되지 않았던 그릭요거트. 이틀 동안 냉장고에 더 방치했더니 아래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유청이 한... 0.5센치 정도 더 걸러졌고, 드리퍼에서도 빼니까 모양을 유지하긴 했다. 그치만 사먹었던 그 꾸덕함은 아니었고, 조금 마른(?) 요거트 느낌이었다. 오나오를 하기에는 이 정도로도 괜찮을 것 같아서 요리 디비에 포함은 시켜야겠다. 여기저기 찾아 봤었는데, 아무래도 유화제가 들어있는 요거트여서 그런 것 같다. 어느 분이 실험한 글엔가 유화제가 있으면 완벽하게 걸러지지 않는다고 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급하게 집 근처에서 유화제가 없는 요거트를 하나 챙겨서 재도전. 95그람밖에 안되는 작은 요거트지만, 이름도 그릭요거트고(비주얼은 물기 가득 습기 가득이라 요플레다) 유화제가 전성분 중에는 써 있지 않아서 한 번 도전해볼만 한 것 같아서 시도했다. 성공하면 다음엔 두 개로 한 번씩 만들지 뭐.


 -요기까지가 미리 썼던 내용. 결과는, 지난 번보다 더 실패다. 용량이 적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 집 필터가 그 재생종이 같은 색보다 얇아 보여서 그런 걸까. 겉만 마르고 속은 영. 아, 애초에 처음부터 저번 것보다 물기가 더 많기도 했던 것 같다. 다음에 2개로 재도전 해 보고, 영 가망이 없다 싶으면 너도 오나오 재료로 쓸 테다.

그럴 듯한 겉모습만 있고, 속은 그냥 요플레다. 이름만 그릭 요거트인 풀무원 다논 친구였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저건 내 노동력이라고는 설거지 말고는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저 정도도 나쁘지 않다. 단지, 만들면서 (결과도 안 보고) 추천했던 친구들에게는 사실을 알려줬다. 요런 장단점이 있다고. 실제로 한 친구는 저것과 같은 것을 어머니가 마침 사오셔서, 그럼 면보로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뭐라도 도움 되면 좋지 뭐!




 사실 내가 실망하지 않은 이유는, 믿을 구석이 생겨서였다. 주말에 본가에서 가져 온 면보! 엄마, 나 면보 하나만... 이라고 외쳤지만 어떤 거? 라며 커다란 지퍼백 하나 가득 면보가 있을 줄은 몰랐지. 엄마가 골라준 성기지 않은 면보를 들고, 우리집 신무기 밥솥으로 그릭요거트를 도전해 봤다.


 사실 이 레시피 자체는 예전에 본가에서 한참 요거트를 챙겨 먹을 때도 봤었는데, 그 때는 집에 밥이 비는 날이 없는 대가족이었어서 시도할 수 없었다. 그치만 우리집은 밥솥 가동이 일주일에 1인분만 되어도 많이 썼다 할 정도이기 때문에, 재료를 준비하고 시작!


보통 요거트 한 통에 우유 1리터를 쓰길래, 이래저래 모아 본 우유 대략 1리터!

 레시피는 굳이 출처를 밝힐 필요도 없을 정도로 쉽고 여기저기 존재했다. 요거트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누가 성공했다는 후기가 있던 액티비아로 준비했다. 어쩌다 보니 집에 있던 우유 중 반이 소화가 잘 되는 우유라서 걱정하긴 했는데, 유당불내증 있는 분들이 저 우유로 성공한 사례가 있길래 안심하고 진행했다.


 액티비아는 그냥 먹을 땐 설페이트(아황산염) 알러지가 나긴 했었지만, 그릭요거트를 사 먹을 땐 심하지 않았던 걸 보면 아황산염은 유청 거를 때 같이 걸러지나보다 하고 진행했고, 실제로 완성된 그릭도 크게 알러지가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시리얼이랑 같이 먹어서 원래도 조금 났을 것이다).


밥솥으로 (그릭)요거트 만들기

1. 우유 1리터에 요거트 1통을 밥솥에 콸콸
2. 잘 섞어주고 보온 1시간(2배를 쓰면 2시간)
3. 전원 끄고 8시간 정도
4. 꺼내면 요거트 완성
5. 면보에 넣고 체에 받쳐 유청을 걸러내면 그릭!
     (냉장고에서 원하는 질감까지 진행)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했는데, 우리 집 3인분 밥솥에 1리터 우유와 액티비아 한 통은 좀 많았나보다. 아마 내 우유 네 팩이 1리터보단 모자랐을텐데, 1리터 전부 했으면 넘쳤을 것 같다. 우리집 체도 다소 모자라서 조금 기다렸다가 유청이 좀 빠진 뒤에 마저 붓고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가 좀 적나라해서 크롭한 사진. 막 넣었을 때와 다시 넣었을 때.

 시간은 대충 보온은 퇴근하고 시작해서, 한시간 좀 넘어서 끄고 다음 날 아침까지 9시간 넘게 뒀다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걸러놓고 출근했다. 퇴근하고 보니 걸러진 유청이 면보에 닿을 정도여서, 한 번 버려내고 다시 싸매서 다음 날 퇴근까지 반쯤 먹은 와인병으로 눌러놓고 나왔더니 짜잔!


사 먹는 만큼은 아니지만 꽤 꾸덕하게 잘 된 크림치즈 질감이다.

 내 손으로 만들...었다기엔 거의 3~4일간 한 것이라곤 거의 없는, 시간이 다 해준 그릭요거트가 완성되었다. 첫날 저녁 붓고 젓고 보온 후 끄기, 둘째 날 아침에 면보에 옮기고 방치, 저녁엔 유청만 버리고 방치, 셋째 날 면보에서 빼서 통에 옮기고 면보 삶기(제일 귀찮았음). 사실 면보 삶기 귀찮아서 둘째 날도 방치한 것 같다. 한번 건더기 헹궈 내고, 유청 들어 있던 냄비 간단하게 씻어서 면보를 넣고 베이킹파우더 대충 붓고 삶고 말렸다. 아 굳이 하면 넷째 날 이거 접기까지... 총 4일 걸린 작업. 더 꾸덕하게 먹으려면 중간중간에 면보를 손으로 짜주면 된다는데,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 이상 40분 왕복해서 사오기 귀찮아서 매일 10분 할부로 그릭요거트 만든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큰 주머니였어서, 저 주머니 속에 건더기가 걸려서 조금 귀찮았다.

 여기서 끝나면 좋았을 텐데. 만든 날은 야근 후 귀가여서 그냥 옮기고만 말았는데, 옆에서 한 숟갈 퍼서 요거트볼을 만들어 먹은 언니가 맛이 그럴듯하다고 하면서 한 마디.


근데 근종 때문에 유제품 안 먹는다더니 아예 만들어서 먹니?

 

 뼈를 씨게 때리고 가서 아팠다ㅜㅜ 그래도 어차피 야근 시즌엔 스트레스 받으니까 빵도 먹고 과자도 먹고 피자도 먹고 온갖 나쁜 걸 다 먹는데, 그것보단 나은 게 아닐까!



 번외. 만들기 전 퇴근길에 여러 레시피를 봤었는데, 대체로 비슷하지만 몇 가지 미신처럼 터부시되는 게 있어서 재미있었다.


1) 나무 숟가락으로 저어야 한다.

 쇠에 닿으면 유산균이 죽는다는 미신. 이건 어느 글엔가 미신이라고 증명 해주셨었는데 못 찾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치만 나무 숟가락이 하얀 요거트와 색감이 어울리긴 한다. 그래도 우리집 나무 숟가락은 너무 작아서 나는 그냥 국자? 주걱? 같은 걸로 저었는데(뭐라 부르는 걸까, 국자라기엔 깊지 않은 조리기구), 큰 지장 없었다.


2) 보온 후 밥통을 열면 안 된다.

 이거는 귀납적으로 아니라고 증명을 해 버렸다. 우리 집 밥솥이 작아서 보온이 제대로 된 걸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언니가 예전에 초콜릿 만들 때 쓴 온도계로 재 보라고 하더라. 쇠로 된 꼬챙이로 찍으면 끝부분 온도가 측정되어 나온다(오 얘도 쇠였군). 그래서 중간에 한 번 재봤더니 40도 정도, 나쁘지 않은 온도인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잤다. 이미 그 때도 살짝 몽글몽글하니 푸딩화가 되고 있어서 신기했다.


3) 농후발효유를 사용해야 한다.

 이건 개념도 사실 잘 모르겠는데 모두 말을 하긴 했다. 중간에 한 블로그에선 사유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해야 한대요, 라고 해서 딱 내 기분 같았다. 오히려 이것보다는 그냥 사용하고자 하는 요구르트의 이름과 그릭요거트를 합해서 네이버에 검색한 뒤, 성공한 사례가 있으면 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도전들을 해 보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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