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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Mar 03. 2022

14. 올해는 베란다에서 장을 보고 싶다.

서른 살, 밥은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짠. 시작은 어머니의 은혜. 본가에서 받아 온 백미다. 야흐로 야근 시즌이지만, 혹여나 부서에 확진자가 나오거나(?) 해서 급하게 퇴근하는 날 물에 불리지 않고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집에서 레드향도 반찬통도 젓갈도 야무지게 챙겨 주셨다. 나름 내가 만든 당근김치도 조금.... 조금 드렸다! 맛 없다곤 안 하셨으니 괜찮은 걸로. 흠흠.


소중한 백미!

https://brunch.co.kr/@ab32267baa19499/16

(당근김치는 요 당근김치다)


 원래는 냉장고 재료 살리기를 마저 쓰려 했는데, 오늘도 이 시간에나 퇴근해 버려서 그릭요거트 유청만 간신히 좀 비워내고 바닥에 누워 있다. 미리 써 두었던 서랍 속 귀한(유일한) 재고를 살짝 풀어 본다.


 오랜 비염 환자로 살아 온 나는 향에 둔감해서 그런지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들을 좋아한다.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네팔, 홍콩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녀도 어지간하면 살이 빠지기는 커녕 찌기만 했던 비결이다. 나라를 막론한 커리들은 물론이고, 쌀국수, 마라탕, 반미 등등. 오히려 청국장류를 먹지 못하니 한식에 있어서 더 서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에 선물받은 고수로 글을 한 편 쓴 적이 있을 정도로 고수를 좋아하는데, 사실 몇 년 전 쯤에 길을 가다 종묘사를 만나 고수 모종 한 줄을 키워서 행복하게 지낸 적도 있다. 업무 특성상 봄이 바빠서 그 뒤로는 다시 도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요리를 사브작사브작 시작하고 나니 다시 탐이 나는 것이다. 와 그런데, 마트에 가서 보니 고수가 이렇게까지 비쌀 줄이야. 저 정도 양이면 좀 후한 인심의 사장님을 만나면 똠얌꿍이나 쌀국수 살 때 쥐어주시는데. 저걸 삼 천원 가까이 되는 돈 주고 사먹자니 아쉬웠다. 사면 금방 먹어야 하는 문제도 있고.

고수 가격에 놀라 찍었는데 커다란 파세리가 씬스틸러였던 사진.

 해는 조금 미리 계획을 짜서 고수를 파종해볼까, 하고 저번에 시장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고수 씨를 샀다. 고3 땐가, 한참 화분 가꾸기에 빠졌을 때 외국에 다녀와서 먼저 향신료에 눈을 떴던 언니가 고수 씨를 사 와서는 이것도 키워보자고 한 뼘 정도 되는 화분에 와랄랄라 파종해 보았었는데, 당시 돈이 별로 없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멋도 모르고 코코넛 필렛 흙을 썼고, 아마 건강했으리라 생각 됐던 그 씨앗은 거의 다 발아해서 일주일 안에 거의 무순처럼 5센치 가량 웃자라 올라오더니 이리저리 자기들끼리 얽히다가 모조리 죽어버렸던 기억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물빠짐이 잘 되는 흙에 몇 개만 파종하면 되지 않을까? 언니는 왜 쉬운 모종을 놔두고 파종을 하냐고 했지만, 그 종묘사는 망했는지 열지 않고 인터넷 주문을 하기엔 모종은 너무 약한 기분인걸.


 집에 와서 알아보니 아직 고수의 파종시기는 조금 먼 것 같다. 수확은 있었다! 봄가을 두 번 파종이 가능한 친구였구나. 봄에는 4-5월에, 가을에는 9월이라고 한다. 발아온도는 15~20도. 우리 집은 남향집이고 베란다가 있으니, 3월 말에 1차 폭풍이 몰아친 뒤에 거실에서 발아시키고 옮겨 심어도 베란다 온도가 넉넉할 것 같기도 하다. 당분간 아침 출근 전에 베란다 온도를 확인해야겠다.


 일단 알아본 김에 키우고 싶은 목표들을 적어본다. 사기 까탈스러운 태국 식재료를 키우면 좋을 것 같은데. 갈랑가(태국 요리에 쓰이는 생강 사촌)..는 뿌리니까 화분에서는 어려울 것 같고. 레몬그라스도 키울 수 있나? 타이 바질은? 스윗바질도 한동안 잘 키우다 겨울을 나지 못하고 벌레가 가득 생겨서 죽였었는데, 회사에서 토마토가 자주 나오다 보니 좀 탐나긴 한다. 한국에서는 조로만 구하는 카피르 라임도 조금 탐나는데, 나무는 너무 크니까 이건 좀 보류다. 또... 뭐가 있지? 장 갖고 싶은 건 사실 작은 가지들인데, 한국에서 파는 걸 본 적이 없다. 오, 네이버 검색하니 팔기는 하는구나! 마크아, 커밋가지 등으로 파나보다. 메모해두고 다음에 사 봐야지.

다소 낯선 비주얼의 가지. 예전에 어디선가 원래 가지는 작았는데 계량해서 커졌다는 글을 본 것 같다.

 

 글을 쓰니까 그냥 생각을 마구 쓰다가 정리를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대충 정리한 키우고 싶은 목록.


1. 고수

 3월 말 파종하자. 씨앗이 100립 가량 되는 것 같으니 욕심 부리지 말고 5립씩 무한도전 해보는 건 어떠려나.


2. 카피르 라임

 인터넷에서 만원 정도면 모종을 판다. 이파리만 두어 장씩 먹을 거니까 건 카피르 라임잎을 사는 것보다도 더 좋을 것 같다. 다 달쯤에 조금 덜 추워지면 바로 사야지.


3. 레몬그라스

 똠얌을 먹지 않는 이상 생각보다 많이 먹을 것 같지는 않아서 고민. 똠얌세트를 사면 어차피 들어있기도 하고... 파종이 되기는 하는 것 같고(날아다니루것 같은 작은 씨다) 잡초처럼 잘 자란다고는 한다. 키우기는 쉬은 것 같지만 우선은 일단 보류.


4. 스윗바질/바질트리

 파종부터라면 천원짜리 씨앗을 사면 잘 자라긴 (4-5월 파종). 오래 둘거면 아예 이파리가 작은 바질트리를 사서 계속 데려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는데, 향이 좀 다른 것 같긴 해서 포기했다. 엄마가 올해 심지 않으신다고 하면 파종을 고려해봐야겠다.


5. 공심채(모닝글로리)

 파종도 되고 사먹기도 되는데, 크기에 속이 텅텅 비어서 요리하면 금방 숨이 죽으니까 많은 양을 써도 한 접시도 안 나온다고 한다. 먹을 만큼 키우려면 자리를 꽤 차지할 것 같아서 일단 보류. 가다가 씨앗이 보이면 살 정도...?고 생각했지만, 엄마한테 밭에 심으실 생각이 있냐고 말했다가 이건 사먹는 게 훨씬 낫다고 대차게 까였다. 공심채는 사먹는 걸로. 오키오키.


6. 태국 가지/마크아/커밋 가지

 이건 갖고 싶다! 키우고 싶다! 사먹자니 500그람이 최소 단위라고 . 검색을 검색을 해보니 김포의 한 모종가게에서 사서 파종하신 분을 발견! 근처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보니, 4월말 파종이라고 3월~4월 사이에 사서 준다고 했다. 고맙다 구야!


 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키 큰 아보카도들을 다 죽였더니 베란다가 휑하기도 하다. 야근 시즌에 과연 물을 꼬박꼬박 줄 수 있으려나 싶긴 하지만, 올해는 조금 사람답게 이것저것 챙겨 가면서 살고 싶다. 나 아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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