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빛 당신 6. 헤아리면 따스해지는 침묵
6. 헤아리면 따스해지는 침묵.
이미 집을 나와 버렸기에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고 선언 한 그 첫날밤의 기적은 헤아리면 따스해지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맨발로 수도원 앞을 서성이던 조선인이 설마 동길이 한 명은 아니었겠지만, 덕원 수도원의 원장이신 독일인 루치오 로트 (홍태화) 신부님의 허락을 맨 몸으로 받아 낸 건 김동길이 처음이다.
성탄절은 알지만 예수님은 몰랐던, 가톨릭은 들어 봤지만 세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김동길이.
덕원 수도원을 찾아오는 예비신자들과 함께 교리 공부를 배우는 조건으로, 수도원 진료소에 기숙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먹고 자며 살아보며 수도자의 길이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배려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요셉 수사님 덕분임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 수도원에서는 누구도 어떤 과정으로 그런 결정이 이루어졌는지 말하지 않았고, 소년 본인에겐 기적이지만, 그저 정해지면 따르기로 한 수도원의 결정 중 하나인 별일 아닌 일로 받아들여졌다.
분명히 별일인데, 별일이 아닌 일로 흘려보내는 수도자들의 침묵으로 자연스레 공동체의 일원이 된 소년은. 그 신비한 침묵을 홀로 헤아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러나 더 자세히 곁에 두고 보면, 침묵이 따스하게 헤아려지는 삶의 방식은 꼭 수도자들의 것만도 아니었다.
이 공간을 살아가는 일꾼들, 헌신자들, 봉사자들 모두에게 침묵은 암묵적 태도였다.
“선불입니다.”
구둣방 책임자인 루도비코 피셔 수사님의 말에
양장 신사가 노발할 때에도.
“잔금 들어오면 쳐 준다잖소. 이 양반이 사람을 뭘로 보고. 일단 구두부터 만들어 달라니까?”
수도자들이 정직하고 꼼꼼하게 만드는 구두라는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길에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으름장을 놓는 양장 신사에게.
‘비신자인 경우 대금 먼저’라는 푯말을 다시 한번 친절히 보여주며
“이 규칙은, 조선인들 중에 만든 물건을 돈도 내지 않고 슬쩍해 가거나, 아예 찾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것입니다. 신자가 아니면 그를 수소문할 방법도 없기에, 돈을 먼저 내라고 하는 것이니 손님께서 불편하시더라도 규칙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구두 공방에 아무도 없다.
손님은 이미 입소문이 난 수도원 구두 공방까지 그런 소문도 안 듣고 찾아왔을 리가 없을 테고. 듣고 오지 않았다고 해도, 칠피 구두를 갖춰 신을 만큼 신문 화인인 그가 푯말을 못 읽을 정도의 까막눈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예까지 쳐들어온 이상 물건부터 받아 내려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
그 침묵이 당황스러운 양장 신사는 명색이 수도자라는 인간이 장사치처럼 군다며, 구두장이질에 뭐 그리 당당하냐 역정이다.
“치사빤스 똥 빤스다! 엠병.”
자기 분이 안 풀려 기어이 욕을 하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서 피셔 수사님은 조용히 십자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침묵 속에 자신의 소임을 계속한다.
서로 간에 시비를 가려보자며 한바탕 싸움이 나도 될 상황인데, 수도원의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가 나간 후 무례가 지나치다며 험담을 까도 되는 상황인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마치, 이 수도원에 어린애는 없다는 태도로.
동길이 헤아려 본 바에 의하면, 수도원의 일꾼은 여러 종류다. 그야말로 생계 때문에 기술을 배우려고 일을 하는 사람, 하느님께 봉헌되는 수도자들과 달리 가정을 일구고도 신앙 때문에 헌신자로 살아가는 상주 봉사자, 정해진 날마다 방문해 전체적인 일의 일부를 전문적으로 거들어 주는 엘리트 박사님들, 단순 노동을 수행하며 월급을 받아가는 이 땅의 아버지들, 수도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아무 허드렛일이나 주어지는 데로 함께 하는 신학생들까지.
해가 지고 이 공동체에서 함께 땀 흘린 일꾼들이 돌아가 가기 전까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대는 수도원이 큰 소란 없이도 활발히 돌아가는 것은, 역시나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묵직이 자리 잡은 침묵 때문인 것 같다.
이곳에 기숙하며 침묵의 효율성과 매력을 새삼 알게 된 동길은 이제, 침묵이 태도로 자리 잡은 사람들의 심중까지 헤아려 본다.
예비 신학생으로 받아들여진 동길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여러 장소들 중에서, -구두 공방, 농장, 양봉장, 간호소, 부엌 등-어떤 일을 배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도 어른들의 침묵 속에 동길 스스로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분들은 어른이고 동길이는 아직 소년인데, 이미 세워진 예비신학생이 지켜야 할 규칙 이외의 것에 대해선 절대로 대신 정해 주는 법이 없으셨다.
당연히 느닷없이 주어진 선택의 순간에 동길의 뱃속은 요동을 쳤다. 배워놓으면 훗날 절대로 밥은 굶을 일이 없을 여러 장소들이 하도 많아서 솔직히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길은 간호 소를 택했다.
맨발로 찾아온 소년에게는 선불 이야기도 꺼내지 않고, 침묵 중에 칠피 구두를 만들어 주신 피셔 수사님과 구두 공방 사람들도 매력적이었지만, 처음부터 요셉 수사님을 닮고자 이곳으로 들어왔으니까, 사나이가 한 번 정한 길에 흔들림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찰실 두 개, 응급실, 대기실, 그리고 약방이 갖추어져 있는 1층짜리 진료소 별채에서. 병원의 허드렛일을 마치고 간신히 작은 나무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하는 밤. 동길은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겨우 누이고는 조용한 이곳에서 매일 맞닥뜨리는 작은 놀라움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물론 이곳의 놀라움 그 자체는 성경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처녀의 몸으로 나으셨다는 성모님이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느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빵이 남았다는... 문명인이라면 차라리 못 믿을게 당연할 이야기를 찰떡 같이 믿고 따르는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신문명을 가진 서양인이라는 사실에. 일제 치하에서 그나마 학교 교육을 받다가 말았지만 어느 정도 교육은 된 조선인 소년은 충격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책 속에 든 말씀의 진실 여부보다 소년에게 지속적으로 작은 놀라움을 끊임없이 안긴 건, 수도원이라는 이 공간을 침묵으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다.
그렇다. 어른.
“수사님을 닮고 싶어 왔습니다.
수사님처럼 살려면 제가 뭘 해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던, 소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른들의 침묵 안에 숨어서 왔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꼭 필요한 일들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능력. 그렇게 꼭 필요한 일들을 해내고 남은 역량으로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걸 말없이 해주는 태도. 그런 삶이 몸에 밴 어른들.
티 나게 떠들지 않아도, 일장 훈시가 없어도 차분히 약한 자를 돌 볼 수 있는 그분들의 반짝임. 오토바이를 처음 타고 재래시장을 누비던 수사님을 처음 보았을 때의 신비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침묵이 반짝이며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건, 침묵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베려였다는 것을 동길은 간파했다.
어른이란 그런거였구나.
자신보다 어린이에게 작은 배려를 넉넉히 내어 줄 수 있는 사람.
마침내 삶의 미스테리 하나를 알아낸 자신의 영리함이 너무 놀라워, 동길은 하마터면 간이 나무 침대에서 폴짝 뛰어오를 뻔했다.
솔직히 아직도 김동길이 성경의 말씀을 생짜로 다 믿는 건 아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문답 책 한 권을 달달 외워야 하고, 신부님들이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에 응송 하기 위해 따라 해야 하는 라틴어 미사문, 삼종기도에 묵주기도, 거기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까지 더해지면 가톨릭은 차라리 종교가 아니라 거대한 짐 더미 같다.
처음 입교자 반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를 배우고 나서는 얼마나 겁을 먹었던가.
“제 엄마는 신자도 아니었고,
... 차..... 창녀였는데...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며칠을 끙끙 대다가 요셉 수사님께 물었더니, 수사님이 그랬다.
“동길아.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셨지?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란다.”
대부분 침묵 중이신 수사님이 가끔 건네는 지혜로운 말이 늘 떠들지만 실속은 없는 사람들의 말보다 가치 있게 들린다는 걸, 동길은 요셉 수사님께 또 배웠다. 그분의 지혜가 어디서 왔냐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침묵하시겠지.
그럼 동길은 스스로 헤아려 보며,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왔겠지요.라고 침묵으로 대답할 테다.
굳이 말을 안해도 하느님이 그렇게나 뻔하다는 걸 동길이 이미 알았으니, 동길은 엄마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느님께 맹세할 수 있다. 동순이와 나.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죽기까지 기르신 분이니까. 그러면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은 동길이가 맹세하기도 전에 엄마가 너희를 사랑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끝까지 올라가며 탄생과 사랑의 신비를 헤아리다 보면 잠이 쏟아진다.
예비 신자의 한 사람으로 김동길이 종교라는 짐 더미와 고된 씨름을 해야 하는 대부분의 나날엔 성경이 베개가 되기 일쑤다. 그러나, 피가 묻은 이불을 빨고, 환자들이 쏟아내는 오물을 치우며 살아도, 동길은 마음이 편하다. 노곤한 몸이 단잠을 잔 후엔 아침마다 기분 좋은 새소리와 상쾌한 공기가 동길을 깨운다.
이 수도원 안에서 비슷한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해 가면서, 선한 사람이 되고자 선한 것을 배우는 것. 힘든 일도 묵묵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다 잠드는 것. 이런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유가, 어른 다운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을 쳤던 한 소년을 품어 준 서양에서 온 한 어른 때문이라는 걸. 그 어른을 믿고 지지해주며 함께하는 또 다른 어른다운 어른들의 침묵과 베려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안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믿어도 좋을 어른들이 생겼다는 것,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로 자랄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소년에겐 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