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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Aug 05. 2021

바다 빛 당신 5. 평화

5.  평화

1942년. 9월.   


석유, 기차, 금속, 석탄. 일본인들이 권리를 차지한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조선인들이 부지기수다. 10여 년 전에 원산 노동자 총파업에 실패하면서 더 극심한 가난으로 내몰린 조선인들. 수도원의 문 앞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의 아이들로 넘쳐난다.    


수도원 '진료소’의 벽에는 요셉 그라 하머 수사님과 환자들의 생사고락 순간들이 몇 장의 사진으 걸려 있다. 조용한 수도원 문간방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임시로 진료를 시작한 초기 모습부터. 환자들로 어수선한 출입구와 주사를 맞고 난 후 막 마른 눈물로 사진기를 응시하고 있는 조선 어린이의 모습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 수도 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기에 네덜란드에서 빌린 돈으로 수도원 기슭에 작은 ‘진료소’를 설치한 것이, 지금의 동길이 묵고 있는 약방이다.        


하루 평균 5,60명의 환자들이 몰려드는 이곳에서 동길은 간호부와 배달부를 섞은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순서에 따라 진료받을 수 있도록 질서를 잡고, 병실에서 나오는 각종 오염물질들을 치우고 빨래하며, 원산에 있는 베네딕도회의 또 다른 진료소인 ‘성 데레사의 집 ’에서 일하시는 수녀님들과 필요한 시약을 주고받거나, 함흥의 메페르트 수녀님이 활동하고 계신 성심의원, 또는 유 박사님이 소속되어 있는 원산 관립 병원 등을 오가며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고 있다.


요셉 수사님의 오토바이를 타고 싶지만, 눈에 띄는 조선인이라면 수시로 잡아대는 일본 순사들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해서 다닌다.        


급히 가야 할 일이 아닌 경우, 동길은 부러 해안 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는데, 바다가 좋아서다.


어부 집 돌담에 널린 그물, 길가에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 짠 내 나는 명태와 오가는 소달구지, 모래사장에서 노는 아이들. 먼바다에 떠 있는 배와 한바탕 열리기도 하는 풍어제 등. 자전거의 동그란 바퀴를 굴리며 길을 달릴 때, 동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동글동글 해지는 것을 느낀다.    


저 바다를 근원으로, 이 모든 살아있는 사람과 풍경들이 땅으로 밀려온 것만 같다.    


생명은 물처럼 흐르고, 소박한 인생들이 방울방울 제 수고를 다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소금 바람에 마음이 씻기고, 가을볕에 상처가 소독되는  같아. 나를 햇볕 아래 그저, 세상 어디든 그냥, 내어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것이 평화 일까?        


설마.     

현기증과 탈진에 쓰러지길 반복하면서도 환자 한 명을 더 보겠다고 애쓰는 요셉 수사님. 티푸스에 걸려 앓는 사람, 공사 중에 사다리에 떨어져 팔이 부러진 인부, 원산 부두에서 나진이나 평양까지 갈 화물들을 옮겨 싣는 부두 노동자, 자식을 넷이나 달고 와서도 삐쩍 마른 몸에서 젖을 물리는 과부까지. 사실은 다들 너무나 치열하게 삶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존의 열의들이 부딪히고 들끓고, 다치고, 치유되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화합들이 각각의 생명체 수만큼 일어나는 삶. 그 삶을 안다면, 단순히 멀리서 보기에 좋은 것이 평화는 아닐 것이다.    


다만, 수치와 무력감 속에 방치되었던 자신에게 덕원에서 맡은 허드렛일도 살아있는 삶 중의 하나인 것 만 같아, 동길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이 편하다.   


몸 보다 작은 옷을 입고 맨발로 수도원 문을 두드린 채, 문지기 수사에게 무작정 요셉 수사님을 찾아왔다고 말을 했을 때, 동길은 몹시 떨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한 소년의 인생 결단을 고백한 후, 조용히 안내되어 한참을 성전 밖 의자에서 기다릴 때는 혹시 너를 받아 줄 이유가 없다며 돌려보낼까 봐 내장까지 떨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요셉 수사님이 동길을 향해 걸어오자, 귀는 이미 먹어 버린 것처럼, 오직 제 심장만이 세차게 뛰는 소리가 들릴 뿐이어서, 그저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그분이 오시는 모습만을 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잔뜩 긴장한 동길을 요셉 수사님은 조용히 안아 주었다. 자연스럽고도 낯선 기습 포옹에 소년은 잠시 넋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 했기 때문일까. 자신이 이 서양 남자에 비해 아직은 체구가 작은 아이임을 느꼈고,  서양인의 버터 냄새와 함께 파도가 밀려오듯 따뜻함이 스며왔다.   


“평화.”    

서양의 수도자 입에서 나온 조선말.   


둘 사이를 휘감던 안온한 침묵 속에서 그 말 한마디가 더 해진 순간. 동길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인 듯 그 단어를 느꼈고, 익히 들었으나,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평화가 가슴에 닿아 눈물부터 났다.


수사님의 품 안에서, 아버지에게 안겨보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소년의 아픔이 북받쳐 올랐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인지, 자신도 몰랐던 그 상처를, 수사님은 이미 다 알고 듯이 감싸주셨다.


동길은 아이처럼 울었다.     

한참을 울기부터 하고 난 후, 처음 안긴 사람 앞에서 왜 그렇게 펑펑 울었는지가 멋쩍어서 그만 울고 싶어 졌다. 그런데도, 계속 나오는 눈물 콧물 앞에서. 조용히 기다려 주시기만 하던 수사님. 그분이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동길아.”     

동길은 수사님이 자신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고, 마치 동순이가 하듯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제 이름을.. 알고 계셨어요?”    

 

요셉 수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발치에서 자신을 보던 교복 입은 중학생의 얼굴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름까지 알 거라곤 생각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시장 사람들 사이엔 이미 김동길이라는 피리 부는 소년이 회자되고 있었다고.    


일본인들에 의해  무지렁이가 되기를 강요받던 조선 사람들은, 결코 무지렁이는 아니었다. 끈 떨어진 연처럼 시장 바닥을 떠다니던 매국 딴따라의 자식이 바닷가 한편에서 부르는 소금엔 사연이 있다고 여겼다.


아무래도 처량함이 베인 손이라 무던한 일손은  되겠다며  저 아이를 어디로 들여야 하나  곰곰여 보는 상인들도 많았고, 딴에는 누가 좀 그 슬픔을 알아 봐주길 바라나 보다 물밑 짐작만하는 아낙들도 있었다.  풀 먹인 고급 교복을 입고도 고아같이 서글픈 기운이 감도는 소년의 방랑기는 이웃집 숟가락 쯤은 당연히 세고 사는 조선 사람들 사이를 소문처럼 떠돌다가, 요셉 수사님에게 까지 흘러들었다.


받아들여질 품이 필요한 아이라고. 그런데 아무나 받아 쓸 만한 녀석은 못 된다고. 그렇게. 아무 논리도 맞지 않는 이상한 방식으로 김동길은  조선인들 사이에 포용되었던 것이다. 덕원까지 맨발로 찾아온 소년을 수사님께서 안아주기 전부터, 이미.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것이 물밑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소소한 기적임을 알지 못한 채, 동길은 자신이 운이 참 좋았다고 여겼다.



가까이서 보니 요셉 수사님의 신기한 푸른 눈 밑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눈동자에서는 햇살처럼 빛이 쏟아져 나왔다. 푸른 바다처럼 강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오래 감당하기 힘들거니와. 소년은, 제 딴에는 총명함을 내 보이고 싶기도 하여, 부은 눈에 힘을 주고 단단히 또랑 대며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수사님을 닮고 싶어 왔습니다. 수사님처럼 살려면 제가 뭘 해야 하는지요?”    


진지한 동길의  태도에 50을 넘긴 수사님의 입에선 아이 같은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꽃잎 피듯 수사님의 하얀 얼굴에 분홍빛 물이 들었다. 가득 번진 홍조는 존경스럽기만 했던 강인한 어른의 얼굴을  금세 연한 아이의 얼굴로 바꾸어 버렸다. 


낯이 두껍지 못한 어른이 아직 남아 있다니...

이 이상한 나라. 이상한 시대에...


아이처럼 발그레 붉어지는 천연의 미소가 새삼 안심되고 반가워 동길은 저도 모르게 같이 웃어 버렸다.    


평화.


평화...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지만

평화를 명확하게 무엇이라 해야 할지 동길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수사님의 눈빛 안에.

아니, 그 보다 더 깊은 심중에 흐르는 바다 빛 평화가 그날 동길에게도 밀려온 것은 확실하다.


파도처럼 번져 왔던  분의 평화는, 동길이 내딛은 독립의  첫 발자국을 맑게도 적셔주고선 신기하게도 동길의 심중에 깊숙이 남아 떠날 줄을 몰랐다.


고단 한 빨래빨이 중에, 수도원 바닥 걸레질 중에도 청마루에 매어 둔 곷감 꺼내 먹듯 두고두고 꺼낼 수 있는 수사님의  미소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어디로 가셨는지 알길 없던 슬픔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다시 꺼내도 마르지 않을 기억 하나가 심중에 자리 잡은 것만으로도 따뜻한 밥을 먹고 나온 사람처럼 배가 불렀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길을 달리는 동길은 지금 충분히 넉넉하다.  자연스레 받아지고 품어지는 따스함. 그저 수줍어지고 반가웠던  미소. 사람들마다 심중에 그런 기억 하나씩만 쟁여 놓아도 전쟁은 없을 것이라.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배가 부른 짐승은 다른 짐승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학교에서 배웠고, 오직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는 걸 지금껏 보아온 소년은.  그럴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평화..


동길은 태어나 처음 글자를 배우던 때 처럼, 동글 동글 자전거 바퀴를 굴리듯 평화라는 단어를 마음으로 굴려  본다.









*주인공의 수도원 생활 참고문헌: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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