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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Aug 01. 2021

바다 빛 당신 4.선택의 기쁨

4.  선택의 기쁨.

  

1942. 6월.    

덕원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본수탈 대상인 조선 팔도에서 유일하게 버스 운영권을 조선인이 사수하고 있는 원산 시외버스. 이 대견한 버스를 타고 종착역에 내리면 동길은 드디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있게 된다.  

    

더 이상 력함에 자신을 내어 줄 수 없어서. 살아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것이 싫어서. 속으로 이런저런 방향들만 타진하는 시간이 미련스러워. 

떠나기로 했다.


10년 후의 김동길절대 모던보이일 리는 없을 것이라, 일본식  애국 엘리트 양성교육을 받는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에 아나키스트가 되어 오로지 개별자로 떠돌 용기도 없고, 미래를 향해 시시각각 건설되고 있는 원산의 소시민이 되어 내 식구를 챙길 일도 없었다. 동순이 빼고는 마음자리에 살아있는 핏줄없다.


결국 내 마음이 가장 배고파하는 것이 정답이 되었다.    


‘강한 어른이 될 거다.

사람답게 사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 말이다.’    


동길이가 덕원신학교에 가겠다고 말 한 날. 문어 엄마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본처 자식에 대한 부담이 순간에 덜어진 , 아버지도 퍼뜩 네가 다 컸으니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다. 모호하고 막연하게 붙어살았지만,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서운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아직도 어린이싶어 그런 거라 여기며 동길은 짐을 쌌다.  문어 엄마가 사다준 흰 얼굴의 가부키 인형을 끌어안고 동순이는 동길이가 짐을 싸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감지한 것 같았지만 무엇이 필요한 순간인지는 모르는 얼굴로.    

  

그것은 동길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얼마나 가져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짐을 무작정 싸다가 결국은 다 해쳐놓았다. 마지막엔 엄마의 소금만 가져가기로 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의 여름 셔츠와 깜장 바지, 깜장 고무신을 다시 신고 떠나야겠구나.’    


불현듯 명쾌해진 생각에, 동길은 장 속 헌 옷을 꺼내 보았다. 셔츠는 누런 땀이 베여 얼룩 했고, 어느새 키가 커서 바지가 짧았다. 이것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옷을 몸에 대어 보는데. 


“흥”     


비웃음 같기도 하고, 가벼운 유희 같기도 한 콧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문어 엄마였다. 애쓴다는 표정이더니 돌아섰다.  어차피 아버지는 오늘이 날인 줄 알고서 슬쩍 자리를 비운 집안. 동길은 조용히 뒷 문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코웃음 소리 때문에 동길은 거실로 향하는 다다미 복도로 나왔다. 반들반들 윤이나는 마룻바닥이 동길의 차림새를 바닥부터 비추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서로 간에 부끄러운 동거였다.  


결단하고 떠나는 마당까지. 작아진 헌 옷을 간신히 껴 입은 소년의 모습은 멋도 없고 이상했다. 마루는  좀스럽게도 그 모습까지  왜곡시키고 있었. 그림자처럼 어렴풋  비친 초라한 모습에 벌써부터 한 풀 기가 꺾인 동길이  복도를 꺾어 들어갔는데, 다행히 문어 엄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랏빛 여름 라일락이 풍성한 정원을. 삐뚜름히 기댄 채 보고 있는 여인의 고정된 뒤태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객관적으로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동길에게도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무시 못할 아름다움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무응답.


동길은 일본인의 예절을 따라 하며 고개를 숙이고 현관을 향해 갔다. 신발들이 들어 있는 장을 열어 구석에 처박혀  검정 고무신을 찾았다. 없었다. 그런 물건이 애초에  이 모던한 집안의 현관에 남아 있을 리 다.


맨발로 나가자.


그깟 불편함에 벌써 주춤대는 자신이 싫어, 동길은 호연히 숨을 쉬어 보려고  가슴을 열었다.   동생을 업은 채 기찻길 석탄가루를 뚫고 산을 오르던 나를 기억하며 아버지를 찾아온 지 2년도 안되어 발가락에 위생관념이 베인 나를 뱉어내려 했다.


“어디가?”     

숨 뱉을 새도 없이 동순이가 따라오며 물었다.

덕분에 꼬여버린 호흡으로 심장이 난데없이 두근반 새근반 뛰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동생을 돌아봤다. 동길은 최대한 어른스럽게 동생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학교.”     

동순이가 메아리처럼 동길이를 따라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런 옷을 입고 학교에 가?라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제 발가락만 까딱대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8년 전 아버지를 기다리던 개울 앞이 떠올랐다.    


“밤에는 올 거지?”    


그 말에. 눈물이 날 거 같은데,

여기서 울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서.

동생에게.

동길은 이미 마음속에 수없이 연습했던 말을 했다.     


중학생 되면

 오빠가 다시 찾으러 올 거야.”    


동순이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눈으로 되물었다.     


“중학생?”


"그러니까 그날까지.

동순이가 중학생이 되는 날...

오빠는 반드시 너를 찾으러 올 거니까.

못 본다고 울지도 말고 기다리지도 마.

너는 매일 잘 먹고 잘 크고 잘 지내면 돼. "


동순이의 눈망울에 어떤 서러움이 번져갔다.

본능적으로 버림받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무언가 더 많은 말을 하게 될까 봐 동길은 나와 버렸다.   

  

맨발로 동해문화 대문 밖을 나서니 여름 볕에 데워진 신작로의 열기가 쨍하니 올라왔다. 발바닥순간 뜨거워지며 가슴에도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따라 나오지 않았지만, 어디가? 묻고 있을 동생의 목소리가 여전히 따라오는 듯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 날엔 오빠가 올 것이라 일러 주었지만, 새삼 그 말이 부족한 듯 여겨졌다.


기다리지 말란다고 안 기다릴까.

녀석도 기다릴 수 있는 날수의  최대한까지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지쳐, 어느 날 서랍을 닫듯이 제 오빠를 그리던 마음을  닫아 버릴지도 몰랐다.

 

동길은 동순이에게 더 해줄 말이 있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자식이 그것도 못 헤아려 부모가 주는 신호만 따라 살면 딱 부모 꼴이 난다고. 생각 없이 사는 부모가 아무렇게나 내보이는 방향을 따라 사는 것은, 나침반도 없이 대해를 항해하는 바보가 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식이 해야만 하는 선택이 있다고.’     


그런데, 하지 않았다. 동순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동순이에겐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 오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차분히 붙잡고 말을 해 줄걸 그랬나. 그러다. 고개를 젓는다. 떠나가는 주제에. 먹여 살릴 것도 아닌 주제에. 동생은 계속 내편이길 바라는 자기 합리화다.


나중에.  

나중엔 녀석도 지금을 이해할 테니.  



관다리를 넘어서자 땅이 바로 달라졌다. 울퉁불퉁 맨발이라 흙 돌길에 발바닥이 아프지,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흙이 아까 다 못 쉰 숨을 다시  주는 것 같았다. 스멀스멀 스며드는 땅의 생기에  기가 뚫리고 답답했던 가슴이 열렸다. 드디어 호기가 생긴 것 다.


어머니가 뒷구멍으로 찾아들어 오는 순사에게 몸을 내준 대가로 우리 입에 밥을 떠먹이다가 매독으로 죽은 이후, 아버지가 친일파의 위로자를 자처하는 여자에게 빌붙어 살아왔고, 우리도 그렇게 먹고 산다는 사실을 느껴온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녔던 수치와 무력감이 이제야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별것 없는 인생을 괜시리 복잡하게 보기 시작하는 사춘기라는 아버지의 말마따나. 자신의 생명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이. 부모라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당하고 시작되었다는 것을 체감한 이후, 동길은 덜컥 삶에 겁이 났었다.


제 힘으로는 역전하기 역부족인 시간 동안 부모의 삶에 자기 삶도 빌붙이면서, 어느새 남들처럼 그럭저럭 살다 보면 살아지는 어른이 될까 봐. 그런 미래 말곤 다른 출구는 없을 것 같아. 팔자니 분수니 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거기까지가 내 삶이라고 여기게 될까 봐. 몹시 불안했던 나를.


벗어버렸다. 



마침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김동길은. 

그 수사님처럼 살 것이라고.


내 인생이 내 것이라는 것을.  수치와 굴욕 안에서 깨치기 전에는 절대 몰랐다. 내 부모에게 선택당한 삶이 내 삶일 거라고.  무던히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체념으로 벽을 치고  스스로 가두면서도. 무던히 견디지만은 않겠다는 시도를. 마침내 행해 버리기 전까진. 절대 몰랐다. 선택벅찬 기쁨을.


알을 깨고 나올 용기를 부린 새 처럼. 이제는 누릴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을.


그리고 동순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고 강한 어른이 되어 다시 나타날 생각이다. 동생에게 좋은 나침반이 되려고 동길이는 잠시 동생을 떠난다. 자신도 그 학교의 수사님이라고 불리는 조선인 남자들 중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생이별을 결심한 것이다.    


“생이별.”    


동순이 얼굴을 떠 올리며 그 말을 하자, 살을 베인 것처럼 배가 아리다. 그러나 박차고 올라야만 날 수 있는 새처럼  동길은 이제 스스로 선택한 삶을 향해  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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