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날의 나에게 말을 걸다
삶이 이토록 무거운 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내게는 왜 이토록 가파른 절벽이었을까요. 등짐을 내려놓을 곳 없어 방황하던 그 새벽, 나는 마침표를 찍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그날의 절규를 다시 꺼내어,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는 그 아픈 계절을 마주해 봅니다.
뉴스의 화면 속에서 삶과 죽음은 한 문장으로 끝날만큼 간결해 보이는데, 어찌하여 내가 등짐 진 이 삶의 무게는 이토록 길고도 고통스러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병든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차라리 네가 나보다 하루만 먼저 평안에 들기를' 바라는 모진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먼저 지쳐버렸습니다. 무거운 생의 외투를 벗고 그만 먼저 걸음을 옮기려 합니다.
당신에게만은 세상의 고운 것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평온하고 넉넉한 삶을 약속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함이, 나의 과한 욕심이 당신의 고운 손을 거칠게 만들었습니다. 자식이 무엇인지, 그 인연의 끈이 너무도 질겨 우리를 이토록 옥죄었나 봅니다. 이 무거운 짐을 당신의 여린 어깨에 잠시라도 남겨두고 가려는 나의 나약함을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간절한 부탁 하나 남깁니다. 이제 당신도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부디 쥐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놓아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누리지도 못할 그 커다란 집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저 당신의 몸 하나 편히 뉘일 곳이면 충분한 것을요.
어제, 아픈 아이를 위해 혼신을 다하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애잔한 실루엣에 가슴이 미어지고, 까닭 모를 울분이 치밀어 올라 남몰래 눈물을 삼켰습니다. "비워내면 이토록 편안한 길을, 우리는 왜 그리 험하고 가파른 길로만 돌아왔을까요. 이제는 당신이라도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조금은 가볍게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달라붙어도 벅찬 일들을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습니다. 건설 현장의 거친 먼지 속에서 간부라는 직함은 내게 훈장이 아니라 멍에였습니다. 아무리 뛰고 또 뛰어봐도 광활한 운동장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입니다.
내 아들보다 어린 서른 살 남짓한 이들의 모욕적인 언사와 갑질을 견뎌낼 때마다, 나의 머리와 가슴은 수만 개의 균열이 가는 듯했습니다. 젊은 이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부딪히며 홀로 감내해야 했던 그 스트레스는 이제 나의 육신과 영혼을 잠식해 버렸습니다.
매일 품속에 사표를 품고 집을 나섭니다.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지만, '월급'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마약이 발목을 잡습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비정한 현실 앞에, 당신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막상 떠나려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집니다.
문득 자문해 봅니다. 자식이란 무엇이며, 형제와 친구는 또 무엇입니까. 생의 벼랑 끝에서 손을 뻗어 보아도, 내 곁에 남은 것은 오직 당신과 나, 우리 둘 뿐이었습니다. 그 외로운 길을 함께 걸어주어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만하면 세상 구경 잘하고 갑니다. 부디 남은 생은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부디 평안하게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홀로 남겨두고 먼저 마음을 정리하려는 이 부족한 사람을 부디 따뜻하게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2018년 7월 11일, 새벽 지하철에서 쓰다
[후기: 8년이 흘러, 오늘을 다시 살며]
8년 전, 새벽 지하철에서 휘갈기듯 썼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유서'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절박함을 토해냈던 글 속에는, 한 가장의 한계와 절규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삶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외줄을 걷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은 사라지고, 오직 책임감만이 저를 옥죄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8년이 지난 오늘 이 글을 마주하니 당시의 격정은 옅어지고 잔잔한 회한과 함께 묘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여전히 삶의 무게는 버겁고 세상은 녹록지 않지만, 저는 그때의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오늘'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8년이 지나도 삶의 환경이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이 나이에도 평온과 안정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의 이끄심이 없었다면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오늘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유서'를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절망과 체념을 기록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더 깊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서툰 '기도'였습니다.
그토록 아팠던 8년 전의 나를 이제야 가만히 안아주려 합니다. 모진 풍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오늘까지 걸어온 나의 삶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도 아주 작은 위로의 조각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은총 아래 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