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한 지붕 아래 살았어도 가슴 한쪽이 시리도록 비어 있는 당신에게
해 저무는 창가에서
올림픽공원의 너른 벌판 너머로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붉게 타오르다 사위어가는 저 노을은 내 생의 황혼과 어찌 이리도 닮아 있는지요. 창밖의 나무들은 다시 올봄을 준비하건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엔 고독의 그림자만 무성합니다.
여보, 평생을 당신과 한 지붕 아래 살았어도 이 나이가 되니 가슴 한쪽이 시리도록 비어 있구려. 든든한 가장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온, 당신의 따스한 눈길 한 번에 목마른 가련한 남자의 진심을 저무는 빛을 빌려 띄워 보냅니다.
외로움
새벽녘 서늘한 공기에 눈을 뜨면, 온기 없는 당신의 자리가 먼저 나를 맞이합니다. 뒤척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이 뜨거운 삶의 현장으로 나서는 것은, 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저 견뎌내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결국 남는 건 우리 둘 뿐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서로 외에는 기댈 곳이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왜 그토록 서로의 정(精)에 인색하며 살았을까요.
젊은 시절처럼 화사하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예전처럼 곁에서 재잘거리며 환하게 웃어주던 당신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입니다. 이제 내가 당신께 바랄 것이 무엇이 남았으며, 당신인들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염치없지만 이 나이가 되어도 남자는 그렇더이다. 그저 조신하고 정숙한 아내보다는, 때로는 나를 흔들고 깨워주는 요부 같은 여인의 온기가 더 간절해지곤 합니다.
여보, 우리에게 남은 인연이 그리 길지 않음을 잘 압니다. 귀찮아 마시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서로 더 의지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이 처절한 고독이 뼈마디에 스며들기 전에, 그저 서로의 마른 손등 맞잡고 이 길을 같이 걸어줄 수는 없겠습니까.
펜을 놓으며
서재 창틀에 걸린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면, 나는 비로소 가장 정직한 외로움과 마주 앉습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당신의 인기척은 가깝고도 멉니다. 평생을 함께 숨 쉬었으나, 내 가슴속 깊은 가뭄을 당신은 끝내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내 생이 다하는 날, 나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 당신에게 전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고백은 서랍 속에서 숨죽여 울겠지만, 나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당신의 손등을 더듬는 소년이 되어 이 문장 속에 고독을 가둡니다.
[비망록]
노을이 머문 자리 (2026. 3. 9.)
한때는 누구나 우러러보는 잠실의 황금빛 성에 머물렀다. 석촌호수의 벚꽃과 한강의 윤슬을 한눈에 담으며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집은 안식처여야 하거늘, 무거운 유지비는 그 화려한 성을 서서히 창살 없는 감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그 황금빛을 뒤로하고 올림픽공원의 나무들을 마주하며 산다. 집은 여전히 내 삶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죽으면 가져갈 것도 아닌 그 콘크리트 더미에 연연하기엔 내 남은 생이 너무도 간절하고 외롭다.
아픈 자식의 병시중에 꼼짝 못 하는 아내의 타들어 가는 속사정을 알기에, 시원치 않은 벌이를 손에 쥐고 돌아오는 늙은 노병의 마음은 늘 좌불안석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이 가난한 진심을 세상은 알기나 할까. 아내에게 차마 건네지 못한 구걸 같은 그리움을 비망록 한 귀퉁이에 적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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