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늦은 여름날의 이야기 )
간밤에 비가 많이 왔었다.
하늘은 개었지만
무겁고 음습한 공기처럼
요즘 이런 저런 일들로 어지러운 마음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하던 길에
가득 고인 물웅덩이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던
버스가 흩뿌린 흙탕물을
머리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다 젖을 정도로
뒤집어썼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에게 일어났다.
아침에 깨끗하게 샤워해서
샴푸향 날리던 머리카락에선
구정물이 뚝뚝 흐르고
젖은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볼품없는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같은 꼴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이 거지 같은 상황에 대해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끊어 오르는 분노와 따가운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사무실에 도착해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내고 있자니
분노가 우울함으로 바뀐다.
' 이게 뭐람...'
'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집에 다시 갈 수도 없고,
회사 근처엔 사우나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고,
퇴근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이
찝찝함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상황이..
그저 참고 견뎌내야만 하는 나의 현실의 문제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분노와 우울과 무기력이라는 감정이
증폭되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예전에 바이든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컷 만화를
생각해 내었다.
부인과 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신을 원망하던 바이든에게
그의 아버지는 딕 브라운의 "공포의 해이가르"라는 만화를
액자에 넣어 그에게 건넸다고 한다.
주인공 해이가르는 거칠지만 가정적인 바이킹이다.
그는 자신이 탄 배가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맞아 좌초되자 신을 원망하며 하늘을 향해 외친다.
“왜 하필 나입니까?( Why me?)”
그러자 신은 그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왜 넌 안되지?( Why not? )”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고
길 가다가 개똥을 밟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유 없이 맞닥뜨린 불행의 원인을
나의 업보나 신의 계획에서 찾으려 하다 보면
우리는 빠져나오기 힘든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나에게도 불행은 찾아 올 수 있다.
그건 그저 ‘사고’일 뿐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욕이나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해주고
빨리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는 것 뿐이다.
그런데 평소에 욕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지라
욕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런 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