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수

당연함의 소중함

by 시월의 귤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아침,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새벽 5시경 안전재난문자가 송부 돼 있었다. 그 내용은 송수관이 파손되어 수도 공급이 중단될 예정이니 미리 음용 및 생활용수를 확보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단수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문자를 처음 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침 세안을 하기 위해 화장실을 이용할 때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을뿐더러, 몇 시부터 단수가 시작되고 언제 복구되는지에 대한 안내문자는 없었다. 기술력이 뛰어난 시대니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모든 게 다 해결 돼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사태의 심각성은 더 켜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 얼른 밥을 먹고 씻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집에 먼저 들어선 아내가 하는 말이,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문자를 확인 못한 아내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단수 사태 예고가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이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이 무더운 여름에 몸을 씻을 수 없다니! 생리현상을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없다니(단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변기의 물도 새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안일함이 원망스러웠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우선 급한 대로 근처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평소 위생적인 이유로 대중목욕탕 이용을 꺼렸지만, 지금은 가지 않는 게 더 비위생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목욕탕을 다녀왔다. 목욕탕을 다녀와서 지자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 중인지 알고 싶어서 검색을 했다. 그런데 파손된 송수관이 하천 밑에 묻혀 있어 복구 작업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6일 오후에 복구될 예정이라고 했다. 기사를 보면서 다음 날 아침이 걱정됐다. 씻지 못하고 용변을 쌓아둬야만 하는 고통과 걱정 속에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안내 방송이 울렸다. 곧 30분 동안 비상급수 공급을 실시할 예정이라 했다. 그 방송을 듣고 물을 틀어 보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30분 뒤에 나온다는 것을 착각해서 들었나 싶었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예상보다 물이 빨리 소진되어 5분 뒤에 비상급수 공급을 중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 안내를 듣자마자 집에 있는 식기구를 몽땅 꺼내서 물을 받았다.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전부 받았다. 그리고 급하게 머리만 감았다. 그리고 5분 뒤 급수 공급이 중단됐다. 가능한 한 물을 받았으나 하루를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집에 욕조와 큰 양동이가 없는 것이 야속했다. 과연 오늘 안에 송수관이 복구되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오후에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지자체에서는 6일 자정에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확정된 사실은 아니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지인 찬스를 썼다. 내 집이 아닌 지인 집에서 씻고 있자니 새삼 이 상황이 억울했다. 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이런 불편함을 겪어야 하는 건지…


샤워를 하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물을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고, 욕조가 이럴 때는 정말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태를 겪기 전에는 물은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 욕조는 공간을 차지하는 비효율적 구조로 취급했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지금은 지인 집에서라도 씻을 수 있는데 전쟁이 나면 정말 이마저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시 수도 공급은 전국적으로 중단될 것이고, 그러면 가장 먼저 식수 확보가 우선이다. 인간은 음식 없이도 몇 주를 버틸 수 있지만, 물 없이는 3일만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씻는 문제는 차치하고 생명 유지를 위해 마셔야 한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거란 생각까지 미쳤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는 물부족국가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수도 공급이 참 잘되는 편이다. 아직도 제3세계 국가 사람들 중에는 물을 얻기 위해 하루 종일 걷는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흙탕물을 살기 위해 마신다. 평소 당연함에 속아 이런 생각을 잘하지 않지만, 가뭄에 단비와 같은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인류애가 생겼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샤워를 마쳤다. 여름의 무더위로 인한 찌든 내가 몸에서 사라진 그 개운함이란!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개운함과 향기를 잊을 수 없다. 역시 물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동안 나는 당연함의 소중함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한다. 이 격언을 나름 귀담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직접 경험을 하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 세상엔 당연한 것들이 참 많았다. 사랑, 건강, 가족, 친구, 가로등, 도로, 물, 전기 등과 같은 것들이 언제나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중에 정말 당연한 것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나는 물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이 격언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이라는 말은 소중함을 잊게 만드는 주문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당연함이라는 말을 경계하려고 한다. 이제는 당연한 것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당연함은 곧 의식적으로 살피라는 하나의 명령어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면 조금은 당연함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않을까. 불편과 불만으로 시작됐던 단수 사태가 당연함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로 끝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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