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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Aug 06. 2020

아무튼, 플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그 성격

보스턴 유학 일기는 매주 목요일 아침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점가에서 핫하기로 소문난 <아무튼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게 됐다. 지금까지 읽은 시리즈는 총 3권. 그 첫 번째는 <아무튼 외국어>. 아나운서 일을 그만두고 미국행을 결심한 그 어느 날 전차책을 덜컥 구매했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에 호기심이 있었던 나라서, 남의 나라 말 배우기에 그토록 욕심 있었던 나였음을 돌이키며 표지를 맞닥뜨렸다. 잘하고 싶었지만 무심히 잘하기엔 장벽과 한계가 많은 그 ‘외국어’라는 것. 어떤 언어가 되었든 늘 시작하고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살짝살짝 맛보는 시간들 속에서도 이번 생엔 너와 인연이 아닌가봐 돌아서기도 하는 것. 혹은 '영어'처럼 늘 인생에 담고 있지만 온전히 내꺼가 되지 않아서 애태우는 것. <아무튼 외국어>를 보면서 그러한 것들을 생각했다. 맘처럼 잘 되지 않는 외국어를 생각하며 좀처럼 맘에 쏙 드는 인생이 만들어지지 않는 삶에 대해서도 자연히 고뇌했다.


요즘 서점가의 아무튼 시리즈. 책의 주제로 삼을 만큼 결국엔 oo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닌 삶은 참 부럽다.



두 번째는 <아무튼, 여름>. 이 책의 저자가 '여름'이라는 계절을 싱그럽게 음미하고 예찬하는 것과 달리 난 여름에 그다지 애정이 있는 편은 아니다. 혹독한 겨울에 비해 그나마 여름이 버틸만하다고 늘 생각했을 뿐. "겨울보단 여름이 나아, 추운 것보다야 더운 게 참을만 하지." 제목만으로는 끌리지 않았던 시리즈 중 하나지만, 다만 갓 새내기 직장인 됐던 그 시절부터 한참 동안 팬을 자처할 정도로 좋아해 왔던 작가님이 쓴 책, 작가만 보고 망설임 없이 구입했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데 글에 매료돼서 결국 여름이 좋아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 (좋아하는 케이팝스타나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게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스타일의 문체 글은 그 힘이 이토록 크다니까.)


그리고 며칠 전 접한 <아무튼 발레>. 곽아람 기자의 글이 좋아 북 캐스트를 듣다가 우연히 이 책에 홀릭. 믿고 보는 기자님의 글에서 흘러나온 책 소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삶의 굴곡과 낮아지는 정점을 발레에 빗대에 표현한 부분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소장한 채 읽어보고 싶었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라는 글귀를 건너건너 전해듣고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구절을 맛보고서 어찌 이 책을 완독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완성된 나의 아무튼 시리즈 3종 세트. 아무튼 외국어. 아무튼 여름. 그리고 아무튼 발레.




아무튼 지간에 '아무튼'이란 세 글자가 붙으면 요즘 책 감성 좀 더 '힙'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철저히 매료돼 있고 애증이 싹 틀 정도로 지겹도록 함께한 무언가가 있다면 아무튼 세 글자를 붙여서 내놓을만하다.


<아무튼, 술>, <아무튼, 떡볶이>까지도 끄덕끄덕 했는데 <아무튼, 양말>까지 이 세상에 얼굴을 쏙 내민 걸 보며 '아무튼'의 위력을 실감했다. 무언가를 당당히 좋아하고 아낌없이 집착할 정도로, 그러니까 '책' 제목으로 삼을 만큼 몰두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 삶은 부럽다. 살다가 그 어떤, 지치고 힘든 순간이 찾아와도 '아무튼' 세 글자 뒤의 00만 있으면 그 사람의 회복탄력성마저 어렵지 않게 발현될 것 같거든. 누군가에 의해 무언가에 의해 자꾸 바닥으로 내쳐져도 올라올 힘이, 딛고 일어설 힘이 00, 혹은 000에 의해서 짠... 하고 샘솟아 날 것 같거든.


내가 아무튼 시리즈의 저자가 된다면 어떤 oo을 택하게 될까.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그 결정적 키워드는 무엇일까.


아무튼 00, 내가 살아가는 날들에 ‘아무튼’ 시리즈의 제목을 붙인다면 저 동그라미 안에 무엇을 첨가할 수 있을까. 어떤 글자가 덧대진 삶을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요즘 가장 몰입하고 있는 게 100일 갓 넘은 아기와 함께하는 일상이니 <아무튼, 육아>? 몇번을 되돌이켜 생각해도 그건 자신 없다. 요즘 일상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일지라도 육아 전문가들의 바람직하고도 유익한 콘텐츠들을 접할 때면 내 자신이 작아지므로. 난 너무도 초보 엄마잖아. 육아지식이 이토록 미천해서 하늘거리도록 얄팍한 노하우마저 없는데 <아무튼, 육아>라고 이름 붙일 순 없지. 양심껏. 아무렴.


<아무튼, 육아>라기엔 너무도 초보엄마 라이프


자주 빈번히 실천하는 게 식이요법, 간헐적 단식이니, <아무튼, 다이어트>? 고3 때 최고치의 몸무게를 기록한 이후 방송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그 어떤 순간이고 독하게 다이어트하는 것만큼은 아주 자신 있기야 하지. 하지만 왠지 <아무튼, 다이어트>라고 이름 붙이면 365일 하루도 일탈 없이 살만 빼야 할 것 같아서 패스.


<아무튼, 다이어트>는 듣기만해도 벌써 피곤해


대학 졸업 전부터 방송을 시작했지만,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너무도 많은 이 세계에서 <아무튼, 방송>이라는 이름은 내 몫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튼, 퇴사>는?... '퇴사' 자체는 인생에서 제법 큰 이벤트이자 전환점이었지만 큰 마찰 없이 평탄하고 조용히 회사를 나왔으니 퇴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대단히 재밌고 속 탁 트이는 기념비적인 에피소드가 없었던 지라 그저 그래. 2년 차를 살고 있는 타국 일상을 반영해 <아무튼, 미국>이라 한다면? 나는 너무도 '한국' 사람. 하루에도 다섯 번씩은 '한국 가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를 외치고 있는 향수병 앓이 요즘이라서 주제 몰입 불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아무튼 라이프를 살고 있는 거지?



아무튼 '플랜'. 빡빡한 계획 없이는 잘 못 버티는 여자. 그게 지켜질 계획이든, 그렇지 않든 뭔가 촘촘히 층을 쌓고 있는 계획표가 없으면 한 시도 편안하질 않은 사람. 30분 단위 계획표를 사랑하고 그 계획들을 거머쥐고 있는 데서 오히려 '힐링' 되는 사람. 그런 플랜녀. 어쩌면 나는 이런 플랜, 저런 계획들에 겨우겨우 기대서 버텨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기와 함께 어쩔 도리 없이 새벽 3시 기상을 하고 나면 아기가 잠든 즉시, 그날의 일과를 또 적고, 그래서 그 주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계획하고, 그 한 달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달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꼬깃꼬깃한 종이에 구태여 '적어놔야' 마음이 한차례 놓이는 사람. 그렇게 '계획'에 계획을 거듭해야 진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드는 하루가 시작되는 사람.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계획집착적인 삶. 플랜녀를 자처한 하루하루.어쩌면 내삶은 <아무튼, 플랜>



계획에 집착해서 좋은 하루하루들. 그래 어쩌면 나는 <아무튼, 플랜>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나운서 시절엔 방송하는 하루를 넘어 방송 그 이후의 삶을 계획했고, 그러한 계획 끝에 떠나 온 유학. 이 유학 일상 안에도 또 다른 계획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는 하루. 누구나 계획이란 걸 세우며 살아가지만 '지키지 못할 계획일 바에야 안 세우는 게 낫지'라고들 종종 말하는 걸 보면 어떤 누군가에게는 '계획 세우기'가 스스로를 옥죄는 빠듯하고 따분한 행위, 빡빡하게 번아웃을 이끌어내는 상징물인 듯도 하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삶의 스타일이 다르고 각자 '자기스럽다'라고 느끼는 자세가 다른 거니까 계획 세우지 않는 사람, 계획 허탈론자들을 비난하려는 마음은 1도 없다. "계획을 세우세요. 삶이 달라질 거예요"라고 자기 계발서스러운 호소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다워지는 시간. 나만의 플랜에 푹빠져드는 순간.


그냥.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애착하는 것 한 가지를 당당히 1로 앞세워서 자랑하자면 그게 '계획'이라고. 그래서 스스로 '플랜녀'가 되기를 자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고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아무튼, 플랜>.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이번 달엔 어떤 순서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몇 권 읽어야지, 에세이만 읽다 보면 머리가 지나치게 말랑해져서 공부가 영 하기 싫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적당히 인문서적과 전공서적에 대한 읽기도 양념처럼 첨가해줘야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 책을 읽어야 할 순서지! 계획적으로 결단하는 편.


영어공부를 하더라도 아기의 먹잠 패턴에 맞춰서 플랜녀 모드. 아기랑 놀아줄 땐 귀로 가벼운 미드를 흘려두고, 아기가 낮잠 들었을 땐 '보스턴 글로브 (Boston Globe)' 지역신문을 읽고, 아기가 아빠랑 놀고 있을 땐 비로소 집중해서 영어 강의를 좀 들어줘야지. 아기가 밤잠 들고나면 나도 잠들기 전까지 영어소설 한 편 읽어줘야지. 따박따박 하루 시간대별 계획을 세워둬야 비로소 내 삶과 그에 임하는 내 태도가 정돈되고 안정되는 느낌. 잔뜩 욕심부려서 허공에 흩어지고 말 계획이라고 해도 난 좋더라. 좋은 걸 어떡해. 남들이 '좀 계획 없이 편안하게 너를 놓아둬봐' 이야기해도 좋은 스타일을 포기하는 건 마치 '나' 자신마저 내려두는 것 같잖아. 이런 계획 집착적인 삶 같으니라고. 아무리 누가뭐래도 플랜녀.


케이크가 층층이 달콤한 시트를 덧대듯, 나도 나만의 플랜들을 성실히 차곡차곡 쌓아올리기. 그렇게 삶을 당충전해나가기


"짧은 머리의 저와 깡마른 저를 사랑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상황을 모르고 살 좀 찌우라는 말이나 머리를 길러보라는 말을 들으면 움찔합니다. 나를 없애라는 말 같아서요"


얼마 전 죽마고우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이런 글을 봤다. 그녀가 애정 하는 것들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의지가 참 아름답고도 다부진 묘사에 깃들어 있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단단한 표현법을 나도 살짝 빌려 써 봐야지. (이건 오마주야, 친구야.)


“계획 세우고 빡빡하게 굴리는
제 모습을 애정 합니다.

계획 같은 거 짜지 말고
편안히 좀 널 놓아두고 살아보라고 하는 조언 들으면
하루 종일 몸도 기분도 찌뿌듯하더라고요.
나를 지워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죠.”



단기계획이든, 장기계획이든 겹겹이 축적된 플랜들로 삶의 벽돌쌓기
오늘도 머나먼 타국에서 플랜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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