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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02. 2021

육아와 저탄고지의 상관관계

부캐는 미국 엄마 (1화)

오늘도 먹어버렸다. 탄수화물 폭발하는 알찬 ‘당 충전’ 식단을 말이다. 미국으로 다시 건너온 지도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 예상은 했지만 보스턴 공항 도착과 동시에 애써 눌러왔던 식욕이 보란 듯이 터져버렸다. 육아하면서 ‘달달한 간식’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느냐는 주변의 신기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알차게 내 ‘저탄고지’ 식이요법 (탄수화물을 최소하고 건강한 지방으로 채워 넣는 식단)은 어느 정도 순항해오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이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얘기였다. 예상은 했지만 타국 도착과 동시에 밀려드는 그 특유의 헛헛한 정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 구석구석마저 굶주린 느낌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내내 허기가 져서 몸이 쉴 새 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랄까. 한 나라에서 한 나라로 건너간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이토록 정서적 허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 16개월 아기 ‘육아’까지 하고 있으니 내 배고픔은 역대급일 수밖에.


한국에서 꼬박꼬박 실천했던 저탄고지 라이프는 어디로…


부라타 치즈와 발사믹 드레싱,
훈제연어와 아보카도.
삶은 계란 반쪽과 통통하고 단단한 체리.



한국에서 즐겨먹던 저탄고지 식단류였다. 활자로 마주하기만 해도 이 얼마나 ‘헬씨’한 식재료가 아니던가, 담백하고 슴슴해서 구석구석 생기가 깃드는 느낌. 전날 밤 11시까지만 센스 있게 클릭해두면 바로 다음날 아침에 식탁에 올려둘 수 있으니 새벽 배송을 내 베프마냥 즐겨 찾았다. 미국 마트에도 위와 같은 식재료가 당연히 있을 진대, 일단 손을 뻗게 되는 쪽은 ‘초 달달’한 달달구리였다. 아기 돌 무렵, 제대로 식단 관리하며 예전 같은 상태의 몸매를 유지해보겠다고 ‘살찔 것 같은’ 디저트들을 그토록 잘 참았는데 괜히 머쓱해서 이런저런 변명을 갖다 붙여보는 건 필연적 과제. 미국에 왔으니 이건 먹어줘야지, 한국에서 이 맛 은근히 그리웠으니까 한번 먹어볼까, 오늘은 아기가 유독 떼를 많이 써서 힘들었으니 이 정도 당 충전은 마땅해!!! 그리하여 보스턴에서 스타벅스보다 더 눈에 많이 띄는 던킨 도너츠는 물론이요, 유니온스퀘어 도넛 가게의 시그니처, 단짠단짠의 혁명 베이컨 도넛, 트레이더 조스의 귀요미 미니 아이스크림 등등. 손 갈 곳도 참 많다.



단짠단짠의 정석, 유니온 스퀘어 도넛의 ‘메이플 베이컨 도넛’ (Maple Bacon Donut). 유독 육아 강도가 셌던 날이라 이 정도는 필요했다고 합리화 땅땅땅.


아기 식사를 차릴 때도 엄마 함께 당충전. 엄마 좀 말려줄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먹는 것보다는 

간단한 요가 동작이나 
클래식 감상으로 기분전환 


하하, 육아인들에게는 공감 제로일 법한 이 멘트. 이런 교과서적인 말을 누가 모르겠나. 스물셋, 대학을 갓 졸업하기도 전 취직한 첫 직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도 스트레스에 꾸역꾸역 먹어 찌운 살이 무려 10킬로였던 바, 외력으로부터 찾아오는 피로와 정상수치 이상의 스트레스를 ‘먹방’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1인 되시겠다. 그러나 해시태그 #미국육아 앞에서 이 원칙은 보란 듯이 흐물흐물해질 수밖에 없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 첫째, 내 나라가 아닌 데서 오는 낯섦과 생활 곳곳에 스미는 ‘불편한 루틴’. 이를테면 (1) 평생 어려운 영어, (2) 이국적 외면의 이웃들, (3) 어딜 가나 상냥하게 눈인사 주고받는 사교적 정서, 이를 견디다 못해 뭔가 ‘달콤함’을 낚아채 먹는다. 둘째, 미국 특유의 ‘아이 돈 케어’ 마인드. 한국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 시선 눈치 보며 살아가기 바쁜데, 나라를 뜨고 나면 비교적 남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될 것 같은 느낌. 고로 식단 관리 몸 관리 의무에 자동 젖어있던 생활패턴에 대담하게도 관대해진다. #에라이, #아몰랑, #일단먹고보자.  


미국 육아에서도 예외 없지. 배달 찬스로 달콤이 간식 짠


선 넘는 당 충전에 가끔 당 수치가 확 올라가 피곤하고 고단할 때면, 한국에서처럼 ‘저탄고지’ 룰을 고수하기가 왜 힘든지 철퍼덕 앉아 반추해본다. 그리고 언젠가 해보았음직한 유사한 다짐을 새기고 또 새긴다. ‘내일은 달지 않은 토마토로 공복감을 먼저 달래야지’,  ‘입이 심심해지려고 하면 쫄깃한 치즈를 먹어야지’, ‘카페인은 수분을 빼앗아가서 배고픈 느낌을 불러올 수 있으니 커피는 꼭 디카페인으로 바꿔 먹어야지’. 저탄고지 모범생처럼 꼬박 세 가지 다짐을 달달 외우듯이 기억하려 애써본다. 제법 단단하게 각 잡혀 보이는 이 생각들은 결국엔 보란 듯이 뒤틀리고 헝클어져버릴 거라는 걸 내심 짐작하면서도 반복하는 루틴. 빳빳했던 퀘사디아 토르티야가 흐물흐물해져서 밀가루 떡이 되어버리는 것마냥 지저분하고 때때로 불쾌할 거라는 걸 알. 면. 서. 도.


한국에서처럼 저탄고지, 안 되겠니?


아아, 미국 육아 앞에 장사 없다. 육아 본연에 쓰이는 엄마의 에너지 소모에 타국살이에 드는 마음의 고단함, 두 가지가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면 늘 ‘당 충전’이라는 얄미운 해소법만이 고개를 치켜드므로. 나라고 수영, 필라테스, 발레핏으로 육아 스트레스 지수를 워워 내리고 가뿐하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싶지 않겠는가. 일단은 미국에서 가정보육을 자처했으니 아기를 안전히 돌봐야 하고 신분이 ‘유학맘’이다보니 미 타임 (me time, 나를 위한 힐링타임)을 가질 여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치’라는 죄책감이 든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내년 학교에 적을 두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영어공부에 힘써야 할 것 같고, 전공분야 서적이라도 한 글자 더 읽어야 할 것 같고… 물론 그전에 아이랑 눈빛 교감 한번 더 하면서 대화해야 할 것 같고. 아, 그러면서 아이랑 달콤한 간식 하나 입에 오물거리며 소소한 행복감 1분 1초 더 누려야 할 것 같고.


그리하여 오늘도 냉동실에 얼려져 있는 티라미수 한 입. 초콜릿 솔솔 곁들여진 그라놀라 한 숟가락. (네네, 당연히 한 입, 한 숟가락일 리는 없고요). 한국에서 보란 듯이 새침하게 유지해오던 나의 저탄고지 라이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의 부캐, ‘미국 엄마’ 라이프가 이어지는 동안은 탄수화물을 향해 선 애타는 식욕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 친정에 잠시 머물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스터디 카페에 앉아 버터 커피를 홀짝홀짝거렸던 지난 반년의 시간이 새삼 그리워진다. 저탄고지 식이요법 주창자들이 애정 하는 브랜드의 버터 커피를 만지작 거리며 ‘아, 배불러’ 지긋이 되뇌었던 어느 봄날. 그날의 케토 (KETO)를 선명히, 곧이어 흐릿하게 추억해본다. 미국 육아가 바짝 가까워질수록 저탄고지는 영영 멀어지는 것이었다.



고백하건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티라미수 냠냠하였다는 것을.


한국에서 아기 어린이집 등원 후, 스터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그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찼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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