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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06. 2021

아메리카노 ‘벤티’ 주세요

부캐는 미국 엄마 (3화)

남편은 늘 같은 시간 같은 물음표를 던진다. 커피 뭐 마실래? 정확히 오전 6시 38분경. 이 시간에 커피숍을 열었나? 신기하게도 미국 스타벅스 대부분이 새벽 5시부터 문을 연다. 육아하는 입장에서는 참 다행인 일임에 틀림없다. ‘새벽형 인간’에 ‘미라클 모닝’ 만나기를 좋아라 하는 1살 아기. 갓 돌 지난 아기와 함께하고 있을 엄마 아빠들은 다 공감할 포인트가 아닐까. 일단 커피가 필요하다. 아기의 꼼지락꼼지락에 억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열고 빳빳하게 굳어버린 몸을 이쪽저쪽 굴려가며 깨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름칠을 해줘야 한다. 이른 아침 육아하는 부모들에게 그 ‘기름칠’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카페인’에서 새어 나온다. 이른 아침, 커피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커피가 있다. 이름도 길고 요란해서 한번 제대로 발음하고 되면 이국적인 감성을 물씬 들이붓게 되는 프라푸치노류, 이른바 얼음을 갈아 스무디 형태로 만들어 내는 커피 스타일부터 중학교 시절 즐겨봤던 시트콤 속 여주인공이 그토록 샤방하고 섹시하게 외쳐댔던 캐러멜 마끼아또, 왠지 마시고 나면 고풍스럽고 쓰디쓴 맛에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해지는 에스프레소 콘파냐, 그리고 아인슈페너, 가을만 되면 고개를 빼꼼히 드는 펌킨 스파이시 라테까지.


수많은 선택지 중에 매일 마셔야 하는 커피라면 나날이 픽업하는 카페인의 종류를 바꿀 법도 한데 늘 같은 커피를 주문하고 애타게 기다리는 모양새라니. 그 이름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벤티 사이즈’. 에스프레소 샷이 총 4번이나 들어가고 총용량만 해도 591ml. 일반 500ml 삼다수 생수병을 하나 가득 채우고도 넘쳐흐를 용량이다. 그란데 (471ml)만 선택해도 적지 않을 양일 텐데 난 구태여 ‘벤티’를 강조해 외친다. 그만큼 피곤했던 거다. 그 카페인으로 정신을 깨워야 할 만큼 난 지금 고단하며 오늘 또 지독히 고단할 거란 암시다. 혹은 커피를 사러 나가는 남편에게 외치는 호소일지도 모른다. “나 지금 엄청 힘들어. 벤티 사이즈 커피를 온몸에 가득 들이부어야 할 만큼.” (1. 그러니 나 좀 오늘 도와줘  or  2. 그러니 오늘 내 신경 건들지 마.)



“당신의 하루에 소소한 즐거움을 드릴게요”


주로 라테 음료를 마셨던 풍경은 출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근한 우유 거품과 고소한 우유 향이 사람을 노곤 노곤하게 녹여내는 맛이 있었다.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는 라테가 좋았다. 좀 더 에너지를 얻고 싶을 땐 우유를 두유로 바꿔달라 하고 그 풍미를 즐겼다. “Let us add a little joy to your day”라는 스타벅스 슬로건에 걸맞게 라테 한 잔은 사람의 축 처진 어깨를 살포시 껴안아 주는 맛이 있었다. 그 백허그의 느낌을 사랑했다.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라테=끌어안는 맛”이다. 그래서 결혼 전 홀로 출근길 퇴근길에 그토록 라테 한 잔을 즐겼던 걸지도. 곁에 아무도 없어도 외롭지 않을 맛. 허전함마저 잠시 잊게 해주는 마법의 액체.


그러한 루틴이 너무나 강력한 기억을 남겼던 탓일지, 마음이 복잡하고 몸이 바쁠 땐, 자연 ‘끌어안음’의 맛을 갈구하지 않게 되는 듯. 최대한 나를 강퍅하게 만들고 더 독하게 돌변하게 만들, ‘쎈’ 친구가 필요한 거다. 포근하고 노곤 노곤한 감성을 즐기며 빠져들기엔 나는 너무 정신없는 새벽을 열어야 한다. 육아인이니까. 이미 아기는 일어나서 꼬르륵 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아기의 낮잠 시간 전까지 혼이 쏙 빠지는 아침시간을 보내야 함이 분명하다. 남편이 도와주지만 그에게도 직장 일이 있고, 어디론가 출근해야 하는 의무감이 없는 (일시적) 전업맘이지만 나에게도 할 일은 있다. 그 할 일과 육아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해서 세포의 단면들을 최대한 탱탱하게 긴장시키고 냉랭하게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아 건조하고 담담하기 그지없는 ‘아. 아.’가 필요하다. 그것도 가장 큰 사이즈로.


아, 미국에는 더 큰 ‘트렌타 (Trenta)’ 사이즈도 존재한다. 하루의 시작을 더 강력하고 촘촘하게 열려면 여기서 사이즈 업그레이드가 더 필요할까? 한번 시도해보고자 했으나, 그건 몸 건강에 이상신호를 불러낼까 봐 겁나서 못하겠다. 카페인 과다로 하루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면 그날의 육아는 누가 책임진담.

그란데 (473ml)로는 해소되지 않는 육아 피로감. 벤티로 부탁해.


그리하여 적당히 (?) 벤티 사이즈, 삼다수 조금 넘치는 용량에 만족하기로 타협하며… 나는 오늘도 “벤티 사이즈로!” 오늘 최대치일 것 같은 에너지와 경쾌함을 실어 첨언한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부사와 형용사이지만 ‘겁나 큰’ 커피를 마시며 그날도 순조롭게 평탄히 항해해보자고 나를 들어 올린다. 실제로 티라미수 (Tiramisu)라는 디저트에 “나를 들어 올리는”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던데, 육아와 매일 친해져야 하는 내게 맞춤형 티라미수는 다름 아닌 ‘아. 아. 메. 벤티’. 그렇게 오늘도 591ml의 카페인을 털어 넣고 하루를 연다. 내가 아이스 카페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마시는 이유.


가장 큰 사이즈의 커피를 털어 넣으며, 세포의 단면을 최대한 탱탱하고 냉랭하게 단련시키는 작업. 육아인의 새벽 필수 코스.
591ml의 커피로 매일 아침을 여는 루틴. 아직 트렌타는 겁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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