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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Jul 02. 2019

[보스턴 밑줄긋기] ‘간헐적' 걱정이 필요합니다

정희재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7월이 시작되었다. 어제나 그제나 똑같은 하루의 시작인데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경건해진다. 새 달의 첫 날이니 좀 더 바지런히 몸을 놀려야할 것 같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도 몸짓이 더 가볍고 경쾌해야할 것 같다. 책을 쥐는 손길도 좀 더 진지해야할 것 같고 한 단락을 읽어도 좀 더 우아한 자태로 깊이감을 더한 눈동자로 책장을 응시해야할 것 같다. 한 달의 마지막 자락 지점에서 남은 날들을 겨우겨우 버텨내던 몸짓이 아니라 에너지를 덧대어서 더욱 힘차게 하루를 살아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반년이 지난 뒤 본격적인 '하반기'가 시작된 셈이니 새 프로젝트 같은 것도 그럴 듯하게 만들어서 보란듯이 착수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To-Do리스트도 좀 더 짜임새 있게 미션들로 가득채워내야 할 것 같다. 와아, 정말이지 가슴 벅찬 한 달의 첫 날이 시작되었네!


7월의 햇살을 받으며 새로운 달력의 장을 활짝 열기. 하반기 시작지점.뭔가 더 깨어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카페인 듬뿍 충전.


자, 이런 에너지, 좋긴 좋은데 뭔가 '잔뜩' 무거운 느낌이다. 야심차게 시작한 만큼 꿈꿀 것도 많고 실천할 것도 많은데 동시에 '걱정' 된다. 그럼 그렇지, '걱정'이란 이름의 너란 녀석이 등장안해주면 심심하다. 계획이 많아지는 만큼, 포부가 커지는 만큼 천천히 어두운 그림자가 살금살금 살갗을 파고 들기 시작...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7월 1일부터 운동하는 시간을 30분만 더 늘리기로 했는데 이거 오래 못가면 어떡하지. 오늘 내일 하다가 결국 질려서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영어자료 읽을거리를 이번달에는 이것도 시도해봐야지, 앗, 근데 이거 자신만만 시작했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서 1/3도 못 소화하면 어떡하지. 혹은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워서 실력향상에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닌가. 그럼 어떡하지. 저 자료도 보고 싶은데 이번달엔 시간이 안 될 것 같으니 어떡하지,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쪼개 봐야하는 건 아닐까. 아차차. 이 책은 지난달까지는 완벽히 1회독 하려고 했는데 다 못봤으니 어떡하지. 이번달엔 가능할까. 이걸 먼저 해야되나. 아닌데, 이번달 우선순위는 이건데. 어머머. 그런데 이런 걱정하고 있는 사이 집안이 너무 엉망이네. 대청소를 좀 더 자주해야겠다. 미처 철지난 옷 정리를 못했었네. 이건 언제하지. 지금하면 지금 하기로한 과제를 할 시간이 없는데...? 근데 또 배가 고프네. 간헐적 단식을 이번달에도 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흐지부지된 날들을 떠올려보자니 또 걱정된다. 이번 달엔 다른 식이요법을 시도해볼까. 끝나지 않는 걱정.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계속 물 수 있을 것 같은 릴레이 걱정 행진.


'걱정'이 차오르는 얼굴,  당장 거울을 쳐다보면 왠지 빗물 흘러넘치는 창문 모습이겠지. 걱정 덧입은 '울상'


걱정으로 시작해서 걱정으로 끝나는 하루.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돌림노래가 또 새롭게 시작되었다. 한 해 달력의 절반 지점, 새로운 달력의 장을 만났다고 해도 이 고약한 습관은 여전하게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 정해둔 알람소리를 못 듣고 늦게 깨면 어쩌나 걱정, 혹시라도 전철이나 커뮤터레일이 제 시간에 도착 안하면 어쩌나 걱정. 열차 객실 안에서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되면 책이 잘 안 읽힐텐데 그러면 또 하루 속상할까봐 걱정. 이런 걱정하는 틈새로 핸드폰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서 필요할 때 못 쓸까봐 걱정... 7월의 첫날 걱정거리들은 지난달과 닮았고 또 지난해 이맘때와도 또 닮아있었다. 새 달력을 넘기면서 호기롭게 생겨나는 흥분감만큼이나 걱정의 양과 폭은 새롭게 갱신되고 증폭되기 시작하곤 했다. 도무지 줄어들 줄 모르는 이들의 존재감에 살짝 피로감이 느껴질 무렵, 문득 이 구절을 떠올렸다. 제목부터 쏙 와닿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인간이 왜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굶주린 영혼을 지닐 수밖에 없는지
촌철살인의 말을 남긴 바 있다.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음식을 먹을 때
뚱뚱해질 것을 걱정하는 두더지는 없으며
눈가의 주름을 걱정하는 코끼리나
내년 식량을 걱정하는 판다도 없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미래'라거나 과거, 현재와 같은
시간관념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면서부터
불안에 휩싸이는 어른이 된 건지 모르겠다.
정희재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p.64
정희재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p.45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가 이토록 여러번 '걱정'하는 동안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저기, 저 고양이는 늘 나와 반대지점에 있는 것 같았지. 시간 단위로 십여 가지의 걱정을 떠올렸다가 또 지웠다가 하는 사이, "난 아무것도 신경 안 써" 라고 말하는 듯, 고양이 너는 현실세계를 초월해 살고 있는 듯한 신선같은 표정으로 1분1초를 지내고 있는 듯했다. 내일 천둥번개가 치면 아침 등굣길이 불편하려나, 얼마나 비가 오려나, 큰 우산을 가져가야 하려나, 옷을 뭘 입어야 가장 적당할까, 내 속의 걱정 하나가 둘, 셋의 걱정을 바지런히 불러모으는 동안 "천둥번개가 아무리 요란한들, 난 무심히 내 밥을 먹겠소." 라고 말하는 것마냥 한결같이 무탈한 표정을 앞세우곤 했다. 1일 1식이나 간헐적 단식 같은 빼곡한 전략들로 끊임없이 몸매관리에 힘쓰는 시대, 고양이 너는 식이요법이나 식이조절 따위에 걱정을 얹어두지 않아서 좋겠구나. 살이 찌면 찌는 대로, 하루가 빠르게 달리기하듯 흘러가버려서 그날 하루 '생산성'이 제로가 되더라도 그냥 그런대로, 참 맘 편히도 사는 그 모습이 불현듯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불안과 걱정을 껴입고 시작한 하반기의 첫날, 정 반대지점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낯선 모습에 또 다시 나는 '반성'의 지점에 다다르고 말았네. 반성과 고뇌와 걱정의 도돌이표.

걱정 없는 표정으로 걱정을 디톡스 해내는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정리해보건대, 걱정 많은 걱정 소녀는 7월의 첫날, 오전7시부터 오후7시까지 또 한번의 걱정 입은 하루를 잔뜩 이고 살았다. (앗, 적고보니 '소녀'라고 부르기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스스로 찔려서 또 하나의 '걱정'을 보태보보는군) 작가가 언급한 대로 현재와 과거, 미래라는 타임라인을 지나치게 인식해서인 걸까. 지나간 과거에게도 '좋았던 모습'으로 잘 보이고 싶고 다가올 미래에 만나기 전에도 옷 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말끔한 차림새로 잘 보이고만 싶다. 낮12시 정오가 되면 다가올 1시에게 예쁘장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고 혹여 내가 계획한 미션대로 되지 않을까봐 부단히도 '걱정'을 한다.


이것뿐인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도 욕심을 부린다. 지나가버린 아침 11시의 타임라인도 예쁘게 기억되었으면 해서, 혹여 불쾌하거나 지저분하게 기억될 가능성을 자꾸만 꺼내보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걱정한다. 이래도 저래도 걱정을 꺼내고 덧대보고 있는 거다. 고양이는 그냥 낮 12시를 살고 있을텐데. 조금 후과 조금 전이 이렇거나 저렇거나 지금 이순간의 햇살과 바람에 잔털이 흩날리고 따뜻해져감을 그냥 '느끼고' 있을텐데.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나 다가오지도 않은 그 무언가에 '걱정'을 덧씌우며 '갸르릉' 거리지 않을텐데.

 

종종 간헐적 단식을 실천하듯이 때론 마음의 디톡스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른바 '간헐적 걱정'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각, 미국 현지 시각으로 20시 26분. 글을 마무리 짓는 대로 바지런히 운동을 가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짓는 유산소 운동과 스트레칭을 해야하겠다. 혹시라도 글 업데이트가 늦어지면 운동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까봐 그마저도 걱정. 운동 마치고 와서 내일까지 읽어야할 자료가 있는데 혹여라도 읽다가 금방 졸려서 오늘의 할당량을 소화하지 못할까봐 걱정. 흐르는 시간을 곧이 곧대로 내버려 두지 못하는 나쁜 습관을 여전히 매일 유지하고 있는 '나의 성격과 습관'마저 걱정이 되는 지경이라니! 걱정걱정하는 마음은 모양도 평평하지 못하고 구불구불 참 못나게 굴곡질 것 같다. 평평하지 못한 마음새를 고르고 단정하게 펴고 싶다. 7월은 그랬으면 좋겠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가. 어제와 내일을 벗어내고 지금 오늘 이 순간을 살아보시게" 간헐적 걱정의 종결자


심란한 표정으로 무겁게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쓱' 쳐다보고 귀 한번 쫑긋거리는 고양이. "자네 뭐가 그렇게 복잡한가. 해질녘 노을도 예쁘고 기온도 제법 따뜻한데?" 7월의 첫날을 뭐 그리 복잡하게 살아냈냐고 따끔한 훈수를 두는 것 같군. 그래 넌 좋겠다. 어제와 내일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말이야. 작가의 말을 다시금 되돌리고 중얼거려본다. "음식을 먹을 때 뚱뚱해질 것을 걱정하는 두더지는 없으며 눈가의 주름을 걱정하는 코끼리나 내년 식량을 걱정하는 판다도 없다." 그렇다면 7월의 둘째날만큼이라도 '걱정'끼 한껏 덜어낸 걱정 디톡스 좀 해볼까. 앗,,, 아니지. 거참. 내일의 걱정을 덜어내자고 미리 계획하는 것도 결국 걱정의 전초전 아닌가.


간헐적 단식하며 쌓여가는 칼로리를 덜어내보겠다고 다짐만 할 일은 아니구나 싶다. '걱정' 먹고 사는 일에도 간헐적 단식과도 같은 조절이 절실하겠다. 이른바 '간헐적 걱정'도 필요한 세상. 항구적, 영구적 걱정은 거부하겠다. '항구적', '영구적'이라는 수식어는 한반도 평화에만 적용해도 충분하니까. 내일은 식단도 마음도 '간헐적' 프로젝트에 성공하길.


걱정 벗을 내일을 기다리며 또 한번의 밑줄

정희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p.45

이게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당장 현실적으로 손에 잡히는 증거는 없다. 나를 만나기 위해 어떤 운명이 먼 곳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얼마만큼 왔는지, 과연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나름의 질서를 따라 빈틈없이 돌아간다. 외롭고 고단하고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운 시기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정지당한 것 같았던 그 시간조차 꼭 필요한 멈춤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 덕택에 전진하지 않으면 행복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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