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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사임당 Mar 26. 2021

쓸 데 없는 소리

말의 힘과 침묵의 힘과 글의 힘 중에 무엇이 더 강할까?

지난 여름의 글, 다시 읽어보니 새롭다. 

요즘도 나는 '쓸 데 없는 소리'를 계속 하면서 산다. 



더할나위 없이 자유로웠고 평온했던 한 주가 지났다.

아이가 집으로 왔다.

일주일 간 집을 떠나 그 곳에서 그렇게 신나고 행복하게 놀았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아이는 동생과 키키덕거리며 생각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톨게이트에 접어들어 두 번째 휴게소가 나올 때 까지 흐느끼며 울다가 엉엉 울다가 나라를 잃은 듯 통곡했다가 울음을 그칠 듯 끅끅거리다가 다시 눈물을 토해내 듯 울었다.

왜 그렇게 우냐고 물으니 형아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고작 8살인데 넌 정말 사랑이 뭔지 아니?


나는 사랑이 뭔지 아는 걸까?


엊그제까지 그 평온 속에서 화도 나지 않고 깔깔깔 웃음이 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다. 아이를 데리고 내려오던 날부터 뭔가 삐끄덕거리니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단단히 삐쳐 있다. 집으로 빨리 내려 가자고 자꾸 재촉해대는 남편에게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짜증을 냈던 것 같다.

언니는 우리가 입고 온 옷들을 지난 밤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건조기에 말려서 준다고 했는데 빨래량이 많아서인지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졌다. 중간에 건조 상태를 확인해보더니 새벽에 수건을 먼저 탈수시켜 넣어놓고 아침께 다 된 옷가지들을 함께 건조를 시켰더니 퀴퀴한 냄새가 나서 안되겠다며 세탁실로 가서 시끄러운 물소리를 내더니 띠릭, 다시 건조기가 돌려 좋은 냄새 나게 해준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우리 빨래는 그냥 들고가서 말릴께'라고 말했어야 하나?


뽀송뽀송 다 마른 빨래를 갖고 가면 또 다시 건조대에 널고 개키는 수고로움 없이 바로 옷장에 넣으면   더 


 미용실에 가서 이발을 시키고 왔다. 사람이 많아 머리를 못 감았다고 머리카락들이 몸에 들어 갔으니 아이에게 어서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곧 집으로 떠나면 형과 동생과 놀지 못할테니 아쉬움과 미련 등으로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어 시키는대로 샤워할리가 없었다. 남편은 본인이 시키는 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자 나한테 어서 아이를 챙기라고 했다. 둘째 아이 기침때문에 임시공휴일에 하는 소아과 진료를 봐야한다고 서둘렀던 나때문에 그의 마음이 더 급했을 수도 있다. 지금껏 서둘렀던 나는 건조기에서 하염없이 돌고 있는 우리 빨래때문에 빨리 가긴 글렀다고 마음을 비웠는데 말이다. 남편의 조바심이 난 그 때 나는 그동안 찍은 영상들을 편집하여 언니에게 전송하고 있었다. 내가 그냥 앉아서 폰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똑같은 말로 보채기에 아직 건조기도 기다려야 하고 시간이 있는데 왜 그러냐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리고 오전 내 돌아가는 건조기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은 안될 갓 같아 그냥 빨래를 꺼내어 달라고 했다. 건조가 다 되어 있었다. 쨍하게 말라 있는 걸 보니 냄새도 좋고 어서 접어서 백팩에 가지런히 담고 짐을 꾸렸다. 이것 저것 싸갈 것들을 챙기고 정신 없이 집을 나섰다. 오후 1시에서 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침을 10시가 넘어 먹었다. 언니가 먼저 일어난 두 아이들에겐 새우볶음밥을 해주었다. 그 다음으로 어른들에겐 불판에 장어를 구워 장어덮밥을 만들어 새우장과 같이 먹도록 했고 마지막으로 일어난 두 아이들에겐 새로 밥을 지어 갈비탕을 끓여먹였다. 그렇게 식사와 설거지를 끝낸 시간이 11시 반이 넘어서였고 언니는 그 틈에 계속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집에가서 짐 정리하는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라고 도와주려고 무리하는 것 같은데 그런 상황 속에서 빨래 그만 돌려서 꺼내줘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생각지도 마음에 두지도 않은 짧은 언성 높임에 몰랐는데 남편은 가시가 돋힌 듯 잔뜩 화가 났다. 다른 이유가 있는가 했는데 처형 앞에서 큰 소리로 자신을 나무란 그 되먹지 못한 상황이 까끌했는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온다더니 우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차에서 대기 중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차 안에 내려 앉는 불쾌한 공기 무엇 때문인지 몰라서 재차 물으니 그 때문이라 했고 나는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싶은 여러 말을 삼켰다.



운전하는 내내 화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주특기인 귓등 머리를 긁적였다. 톨게이트로 올려야 하는 순간 지나쳤다. 운전대를 한번 내려 치고 다시 귓등을 아주 세게 여러번 긁적였다. 아이들이 들떠서 시끄럽게 하니 더 짜증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앞서가던 차량 바퀴가 밟은 차량매트 같은 것이 우리 차 범퍼를 덮쳤다. 정말 사고가 나는 줄 알았다. 남편은 분노의 질주를 하다가 제일 가까운 졸음쉼터에 정차했다.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운전할테니 쉬라고 했고 그렇게 운전을 시작했다. 옆좌석에 큰 아이가 앉으니 마음이 편안했고 둘째도 나의 편안한 드라이빙에 잠이 들고 신경질적인 신랑도 눈을 감으니 살 것 같았다. 피해야 할 때는 피해라! 그게 상책이다.



아마 배가 많이 고플테지만 먹으라고 한다고 해서 먹지 않을 것이므로 영산휴게소를 들려서 (뭐살까 물어도 안먹는다 대답만 할 뿐 결국 담배만 태웠다.) 나는 아이스바닐라떼 하나 아이들은 자기 먹을 과자 하나씩을 사 들었고 운전대를 다시 돌려주었다. 커피가 들어가니 기분이 더 나아졌다. 오후 5시가 넘어 도착했고 서둘러 소아과에 갔다. 진료를 보러 먼저 올라가라던 그는 주차하고 올라온다더니 결국 나 먼저 택시 타고 집에 갈테니까 애들이랑 차 타고 오라고 했다. (아니 이 무슨 기가 막힌 뱉으면 말인 줄 아는 쓰레기어를 구사하는건지) 폭염으로 에어컨을 켜고 자서 목이 따갑고 기침이 나는 건 작은 아이도 그렇고 나도 그랬는데, 진료가 긴 것도 아니고 금방 끝나고 약 타면 끝인데 10여분을 못 기다려서 우리 먼저 가라고? 목구멍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수많은 담지 못할 뱉기 싫은 나쁜 감정을 삼키고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진료를 마친 우리는 마트에 가서 쌀도 사고 만두도 사고 우유도 사고 반찬도 사고 언니가 준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가져 올라왔다.


낑낑대며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오니 소파와 일체된 남편이 드러누워 나혼자 산다를 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혼자 살고 있는 풍경이었다. 급히 쓰레기봉투에 버려잔 진라면 사발면 용기와 세탁기 위에 놓여진 다 먹은 콜라. 그 짜증가득 덥고 힘들어서 먼저 택시 타고 간다던 남편이 가장 먼저 한 건 주린 배를 달래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느낀다. 하염없이 덥고 상황적으로 짜증나고 화가 나지만 그럼에도 배는 고프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다.



과연 무엇이 언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앞으로의 상황은 뻔하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것, 아이들에게 자신의 뽀족한 감정을 다 드러내는 것, 원래도 피로하지만 극도로 더 피곤하다하며 죽을 상을 하고 집으로 와 침대로 달려가고, 본인이 직접 라면 따위를 끓여먹으며 몇 일 버티는 것, 과연 그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의 예상 시나리오는 그의 오늘 퇴근과 동시에 동선 하나 틀리지 않고 적중했다. 그리고 대화를 요구했다. 나는 대화하고자 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 등을 돌리며 더 열받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듣지 않으려는 자에게 떠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짜증내는 어조로 큰 소리 쳤다는 이유로 1박 2일의 불필요한 상황을 연출하는 그에게 분명 단호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호의를 너의 권리로 착각하지 말라고,
이건 마치 궁예의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와
무엇이 다른가?



말의 품격과 말센스, 하버드의 화술학 등을 읽었고 또 내 입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말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 절대 충고나 비판을 하지 말라 했지만 불가능했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의 집밥 같은 공감을 익혔지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모든 생활이 책의 이론처럼 되지는 않는다. 다만 노력할 뿐이다. 더 불필요한 날선 말들을 뱉었을 수도, 우리만 버리고 가버린 후에 분노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기타 더 감정적으로 대처했을텐데 의식적으로 말을 삼키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일시적 침묵을 지키는 나도 보았다. 그리고 (청자는 들을 준비는 덜 되어 허공에 대고 말했지만) 차분히 내 감정과 불만을 표현하고 사과까지 요구하는 나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편향된 나의 주관 가득한 부부(기)싸움을 기록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것 처럼 아주 주관적인 글이다. 훗날 다시 읽어보더라도 반박할 수 없는 팩트를 바탕했다. 결혼 9년차 8주년을 몇 일 앞두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싸우고 산다.



일하며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매년 해가 갈수록 서로에게 무뎌지고

어쩌다보내 그런 것은 이제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은데

정말 그는 나를 사랑하는지 궁금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많았다.

눈에서 입꼬리에서 손끝에서 저것이 사랑이구나 했던 것들이 분명 있었다. 그랬었다.



“오빠, 예전이랑 진짜 많이 변했다”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그럼 마음이 변했다는거네?”


“또, 쓸데 없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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