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 같은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눈을 떴다. 9시 58분. 잔뜩 늦잠을 잤다. 큰아이는 내 폰을 가져가 동료 게이머인 동생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남편의 폰으로 열심히 포켓몬을 잡고 있었다. 작은 아이는 소파에 누워 세상 편한 자세로 ‘페파피그’라는 만화를 보며 깔깔깔 웃고 있었다. 곧 큰아이의 게임 시간이 끝났다. 카스텔라 머핀 2개에 우유 한 잔을 마신 흔적이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싱크대 수납장과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8시 반부터 일어나 고도로 집중했으니 사실 배 고플 만도 했다. 갑자기 라면 2 봉지를 꺼내고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곧 다 끓였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10시 15분. 큰아이가 끓인 라면에 김치와 파김치, 전날 저녁에 갓 무쳤던 콩나물 무침을 꺼내어 아침상이 차려졌다. 남편이 이내 눈을 부비며 오자 모두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우와 맛있다.”
“진짜, 맛있네? 지원아, 너 이제 라면 고수야. 면도 꼬들꼬들하고 물도 딱 적당해.”
“면 다 먹으면 내가 밥 볶아서 요리할 거야. 기다려.”
“오빠, 나 한 그릇 더 줘.”
“안 돼. 라면 2개만 끓여서 한 그릇씩만 먹어야 돼.”
“윤서야 그러면 이거 엄마 꺼 더 먹어.”
때마침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오늘 엄마 집에 안 와?”
“오늘 우리 안 가는데? 왜?”
“우린 어제 와서 잤는데, 누나 주말마다 여기 오니까 오늘 오는가 하고. 오늘 윤서 생일이라서 축하한다고.”
“아, 맞다. 생일... 생일맞이 소원풀이를 어제 다해서 미역국도 안 끓였고 케이크도 안 샀네. 나 완전 잊어버렸다.”
“윤서야, 크크크 오늘 생일 축하해. 행복한 하루 보내.”
스피커폰에서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냐는 듯 계속 큭큭 거리는 아이들 삼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그럼 우리 오늘은 뭐 할 거야? 오늘 윤서 생일이잖아.”
일요일만큼은 쉬고 싶었다. 몇 달 만에 친구들과 자유롭게 만나기로 했었는데 컨디션 때문에 약속이 미뤄져서 오늘 낮에 만나기로 했다. 친구에겐 주말에 케어가 필요한 조카가 한 명 있는데 그 조카까지 남편에게 맡기기로 했다.
“띵동”
내 친구와 조카가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손에는 초코 생크림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생각이 짧은 내 곁에 사려 깊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나중에 저녁에 집에 와서 생일파티하기로 약속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남편을 뒤로한 채 나는 현관문 앞에서 애들 걱정 버튼을 끄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친구의 새로 뽑은 차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노키즈 존은 아니지만 키즈는 데려갈 수 없는 일본식 튀김 덮밥집에 갔다. 스페셜 텐동 2개를 주문해서 온전한 맛과 자유의 시간을 만끽했다. 생일인 아이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식당 사이 골목에 위치한 작은 서점으로 갔다. 《강아지똥》 25주년 특별판이 나왔길래 그것도 마지막 한 권이 남았길래 성큼 집어 들었다. 그림책 가격이 꽤 비쌌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책이 눈에 바로 보여서 고민 없이 고를 수 있어 좋았다. 또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지금 남편과 생이별하며 친정에 와서 1년 간 살게 된 친구에게 줄 책도 한 권 찾았다. 제목이 조금 과했고 읽어 보지 않아 무슨 내용일지 괜한 책이 아닐지 걱정스러웠으나 뒤표지에 적힌 문구가 ‘괜찮을 거야. 친구가 좋아할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남편이 떠나면 고맙다고 말하세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자기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한 여성의 섬세한 이야기라니 나도 읽어 보고 싶었다. 책을 사서 시내에 있는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로 갔다. 조용한 대화가 무르익자 우리도 모르게 톤이 올라가고 목소리는 커졌다. 그 사이 남편은 아이들 사진과 동영상 수십 장을 계속해서 카톡으로 보내왔다. 집에서 배달 음식 시켜먹고 놀이터나 잠시 데리고 나가면 편할 텐데, 사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아빠 혼자서 아이들 셋을 데리고 고깃집에 가서 갈비를 구워 먹이고 버드파크에 데려가 새들과 파충류를 만지고, 물고기를 보고 기념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아이들 앞에서 씩씩한 척하고 있지만 피곤이 몰려들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간은 금세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고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에라도 소고기를 사서 미역국을 끓여야 하나 싶어 마트에 가려니 아이가 아빠의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남편이 사오라는 계란만 한 판 사들고 돌아갔다. 돌아온 집은 아이들로 정신이 없었고 남편은 주방 앞에서 가장 정신없고 분주했다. 완성된 김치볶음밥을 테이블로 가져가서 아이들이 맛있게 먹었다. 케이크를 꺼내어 초를 켰고 노래를 부르며 생일 축하 파티를 진행했다. 테이블이 훵 하길래 화분과 원목 장식품을 몇 개 꺼내 올렸고 노래가 끝나고 선물로 사 온 책을 전해주었다. 조촐한 생일 파티가 끝났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늘 주변에 아끼는 사람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을 즐거운 의무라고 생각하는 지원이가 윤서 생일 선물을 챙겨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난 2월 그의 아홉 살 생일에 윤서가 오빠 생일 선물 사줄 돈이 아깝다며 그냥 넘어가 버렸고 제 딴에는 그런 동생이 엄청 얄밉고 서운했는지 동생 생일날에 그대로 꼭 복수해주겠다고 7개월을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밤 생일 파티에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지원의 선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월요일에 정시 퇴근을 하고 저녁거리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원이가 학교 돌봄 교실에서 만들어 온 원목 토퍼를 자랑했고 윤서에게 자기 돈은 안 쓰지만 집에 있는 것으로 밥케이크를 만들어주겠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밥솥을 열어 밥에 소금과 참기름으로 기본 간을 했다. 둥글넓적한 반찬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접시 위에 뒤집어 담았다. 에어프라이에 돌려둔 치킨너겟이 완성되자 그 밥 위에 올렸다. 그 위에 밥을 다시 한 층 더 쌓고 치킨 너겟 몇 개를 더 얹었다. 마지막으로 밥을 한 번 더 쌓아 3층 밥케이크 형태를 갖추었다. 먹어본 생크림 케이크 속에 들어있던 과일들을 떠올려 따라한 듯했다. 다시 전기레인지 앞으로 와서 계란 2개를 풀어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더니 그것을 3등분 해서 1층 기단부 옆을 장식했다. 몇 개 남은 치킨 너겟 3개를 스크램블 에그 사이사이에 놓고는 갓 구워낸 후랑크 소시지 4개를 3층 위에 둥그렇게 원형으로 올리고 나머지 2개는 스크램블 에그 위에 올렸다. 케첩은 먹기 전에 기호에 따라 뿌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3층 후랑크소시지 가운데 비닐팩을 돌돌 말아 올리고 그 위로 우드 토퍼를 꽂았다. 마지막으로 아빠를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어제 쓰고 남겨둔 7살 초를 올려 꽂았다. 맛도 모양도 케이크처럼 그럴싸했고 그들은 케이크 칼로 커팅식까지 하더니 1/4조각씩 적당히 국그릇에 담아 김치랑 해서 맛있게 먹고 식사를 마쳤다.
세상에 없는 레시피로 누군가를 위한 요리를 선물한다는 발상이 놀라웠다. 학교에서 만들어 온 happy birthday 글귀의 원목 토퍼를 살펴보니 알록달록 색색깔로 칠을 하고 섬세한 음영까지 넣어 예쁘게도 만들었다. 평소와 달리 녀석이 최대한의 정성을 쏟았음이 느껴졌다. 일요일 저녁에 파티하고 버렸는가 했던 초와 케이크 칼에 들어있던 성냥을 세심하게 챙겨둔 것도 신기했다. 일주일에 7일을 다투는 고집이 세고 제 멋대로인 여동생이지만 ‘그래도 오빠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사랑스럽고 덕분에 지난밤도 행복했다.
나도 너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
윤서야 부럽다. 오빠가 네 오빠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