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를 잃은 자리에서,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 황석영, 『할매』 독후 기록

by 서사임당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고 사라지는 하루살이부터, 고작해야 칠십 년 남짓을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육백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팽나무에 이르기까지. 소설 『할매』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으로서 등장한다. 작가는 긴 서사를 통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긴 호흡의 시간 속에 잠시 스쳐 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잊고 잊히며 다들 늙어가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 모두 자잘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p. 206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레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떠올렸다. 인간의 서사보다 먼저 자연의 호흡이 흐르고, 생태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그러나 『할매』는 미국 남부의 습지를 배경으로 한 그 작품보다 더 방대하고, 더 묵직한 시간을 품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서해의 갯벌, 겨울이면 하늘을 덮는 철새 떼,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림 한 장이 없는 활자 속에서 독자는 갯벌의 질감과 바람의 냄새를 떠올리게 되고, 한 권의 생물도감을 함께 읽는 듯하다.


군산의 팽나무, 사람들은 그 나무를 ‘할매’라 불렀다. 신목이나 상징이 아니라, 가족의 호칭으로. 그 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조개를 캐고, 바다로 나가 생계를 꾸렸다. 기원제는 초월적 존재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한 의식이기보다, 자연 앞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허락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바뀌었다. 갯벌은 매립되었고, 철새는 머물 곳을 잃었으며, 인간의 삶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할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는 더 이상 같은 언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 이 변화는 특정 개인의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산업화와 개발, 효율과 성장이 삶의 기준이 되면서, 자연은 함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그 순간 ‘할매’는 공동체의 어른에서 비효율적인 장애물로 밀려났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순리’라는 단어를 곱씹게 되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에는 분명 지켜야 할 흐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 흐름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순간, 경고를 넘어선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무안 공항의 참사와 미군 활주로 공사, 새만금 간척 사업이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궤적이 어딘가 같은 굴레 안에 있다고 느꼈다. 자연을 밀어내고 세운 구조물 위에서 인간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복해서 목격해 왔다.


『할매』가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소설이 단지 자연 파괴의 문제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던 존재들—양난 이후의 농민들, 구한 말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천주교인과 동학교도들, 일제 강점기의 소작농들—그들의 소리 없는 외침 또한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약자들에게는 저항이든 종교든 자기를 치유하고 위무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들은 끊임없이 연대했음에도 끝내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좌절의 기억을 묵묵히 지켜온 존재가 바로 할매였다. 그래서 소설은 이 나무를 둘러싼 이야기를 인연과 관계의 순환으로,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로 풀어낸 것이다. 소설 말미에 유 신부가 혼자서 팽나무에 안기듯 두 팔을 벌리고 뺨을 대었을 때, 그가 분명 들었다는 나지막한 쉰 목소리.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는 말한다. 끊어진 듯 느껴져도 결국 자연의 순리는 계속 이어져오고 있음을.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나의 감정은 분노로 나아가지 않았다. 소설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독자에게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읽어야 하고, 기억해야 하며, 잊혀 가는 것들의 가치를 다시 묻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황석영 작가가 5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읽고 공부하며 AI를 보조 작가로 활용하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하나의 소명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오래 침묵했고, 쉽게 결론 내리지 않기 위해 시간을 견뎌낸 결과가 바로 『할매』일 것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질문 하나를 남긴다.

이 갯벌과 이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너무 쉽게 주인이라 착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 물이 들오면 아 우리 보고 생합 그만 잡으라고, 집으로 가라고, 생합 임자가 들어오니까 우리는 가자, 그라고 오지. 생합 임자가 바다잖여. 욕심내지 말고 묵고살 만치만 잡아야지. 육 남매 생합 잡어서 다 키우고 갈치고, 날마다 캐도 가믄 또 있고, 또 가믄 또 있고. 근디 저렇게 갯벌 읎애는 새만금이 공사를 허니께 바다가 죽어가고 생합도 죽어부러. 이제 갸들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p. 198


『할매』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을 우리 곁에 남긴다. 철새가 돌아오고, 물길이 바뀌고, 나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도 인간은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질문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태도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을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장 먼저 한 일은 군산의 카도스테이라는 숙소를 예약한 것이다. 군산에 가서 팽나무를 보고 탐조에 나서 도요새를 만나고 새만금 주변에서 갯벌의 합창을 들어볼 것이다. 이 팽나무가 깨닫고 있을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를 함께 느껴볼 것이다. 이런 대서사를 만날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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