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향수 리뷰
사실 샤넬 No.5 다음 리뷰할 것은 겔랑 샬리마로 정했었다. 그러나 내 빈티지 샬리마 향수가 다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덜 오래된 시대(7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았기 때문에 다른 빈티지를 구할 필요가 있었으며, 샬리마는 리뷰하기 굉장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사실 겔랑 클래식-뢰르 블루, 미츠코, 샬리마는 다 리뷰하기 부담스럽긴 하다)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향수지만 지금까지 쓴 것과 연관이 있을 만한, 고전 향수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겔랑 미츠코를 선택했다.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것이지 아예 하나도 안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적으로는 부담감이 덜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아무튼 겔랑 미츠코는, 겔랑 뢰르 블루가 1차대전 이전의 벨 에포크 시대 유럽의 정취를 표현한다면, 1차대전 후의 유럽의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코티의 시프레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공식 사이트에서는 클로드 파레르가 쓴 <라 바타유>라는,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의 여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내용은 대략 일본 함대 제독의 부인인 미츠코가 영국 해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고, 결말은 미츠코가 러일전쟁에서 둘 중 누가 살아돌아올지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끝난다. 겔랑 공식 사이트에서는 미츠코가 "미스터리"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사실 한국어로 하면 (미츠는 사람 이름에 쓰일 때 한자로 밝을 광, 꿀 밀, 빽빽할 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광자나 밀자가 된다. 아마 비밀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빽빽할 밀을 의도한 것이겠지만, 한국어로 발음하면 그 신비스러움이 한꺼풀 벗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성별과 상관없이 겔랑 미츠코를 좋아했는데, 잉그리드 베르그만, 진 할로우, 찰리 채플린, 디아길레프, 그리고 향수 리뷰어 루카 투린 등이 있다. 겔랑 미츠코는 시프레 향수기 때문에, 오크모스에 대한 IFRA 규제에 굉장히 강하게 영향받은 향수 중 하나다. 2010년의 재조합에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으나, 2013년의 재조합에는 호평을 받았다. 현재 한국에 들어오는 향수가 아니어서 직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 버젼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지만, 보통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가진 것은 아마도 1950~1970년대 사이 퍼퓸 엑스트레, 그리고 1987~1990년 사이 만들어진 퍼퓸 드 뚜왈렛이다. 겔랑 향수병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링크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https://guerlainperfumes.blogspot.com/p/guerlain-flacon-list.html
흔히 겔랑 미츠코에 대해 "코티의 시프레에 복숭아향을 더한 것"으로만 설명하곤 하는데, 내 생각에 이것은 미츠코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복숭아향이 가장 특징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여러 향이 다소 투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코티의 시프레에서 표현되었던 아이디어를 훨씬 더 부드럽고 곡선적이게, 더 세련되고 우아하게 만들어준다.
시향지에서는 시트러스향이 아주 많이 나고, 소량의 복숭아 향이 났다. 미츠코의 경우 모든 시향에서 우리가 흔히 현대 향수에서 접할 수 있는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 과육의 향보다는 복숭아 껍질에서 나는 향이 나서, 달달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좀 더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레몬과 베르가못 향이 굉장히 많이 났는데, 새콤달콤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복숭아 향을 좀 더 상쾌한 방향으로 가져가는 역할을 하였다. 4분 후, 시향지에서 약간의 스파이시한 시나몬 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강렬하다, 맵다는 인상보다는 복숭아향의 달콤함을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7분 후에 소량의 오크모스 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숭아향이 들어간 현대 프루티 플로럴 향수에서 받을 수 있는 경쾌하고 명랑한 느낌과 아주 다르게 좀 덜 감정적이고 더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10분 후 시향지에서 장미향을 맡을 수 있었는데, 플로럴한 뉘앙스도 당연히 존재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그린한, 장미 꽃봉오리가 연상되는 향이 앞에서 말한 향과 섞이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나자 시향지에서는 다소 인돌릭한 자스민과 그린한 장미, 시나몬에서 나는 살짝 스파이시함, 복숭아의 달콤함과 오크모스향이 났다. 30분 후 자스민보다는 장미향이 더 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복숭아의 프루티함과 오크모스의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40분 후에 다시 자스민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머지 향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지, 플로럴한 뉘앙스를 마구 풍기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1시간 후 시향지에서는 이 향과 결합해 앰버향이 살짝 나다가, 1시간 10분 후에는 어디에서 났는지 플레이도우 찰흙같은 앰버향과 오크모스향이 났는데, 앰버가 아주 풍성하거나 아름다운 느낌은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는 너무 꿉꿉한 느낌이고 향 전체의 조화를 깨트리는 느낌이어서 좋진 않았다. 잔향에서는 특이하게도 이 앰버향과 복숭아의 과일향이 섞여 내 기준에서는 조금 과하게 단 느낌이 들었는데, 그나마 오크모스의 어두움이 이것을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대략 25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피부에서는 시트러스향이 시향지에서보다 훨씬 적었고 대부분 복숭아와 오크모스향이 났다. 복숭아에 더 치중해 있었지만, 오크모스 특유의 어둡고 풍성한 느낌이 뒤 배경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4분 후 시나몬의 스파이시함, 복숭아의 프루티함, 그리고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크모스의 어두운 느낌보다 훨씬 밝은 그린향이 났다. 7분 후 피부에서는 시향지와 비슷하게 오크모스와 복숭아, 시나몬향이 났는데 시향지에서보다 훨씬 단향과 스파이시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10분 후 피부에서도 장미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시향지에서는 그린했다면 피부에서는 그린하다 못해 약간 메탈릭한 향까지 났다. 20분 후에도 이 메탈릭하고 그린한 장미가 주가 되었고 살짝의 스파이시함과 오크모스향이 가미되었으며 과일향은 아주 약간의 부드러움을 남겼다. 30분 후, 피부에서는 시향지에서보다 빠르게 플레이도우 같은 앰버 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앰버가 모두 이런 향을 내는 것도 아닌데 어디에서 이런 향이 났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다소 개인적으로는 향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향이었다. 40분 후에도 향 전반적으로는 퍼퓸 엑스트레에 비해 더 가볍고, 밝고, 그린한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플레이도우 향때문에 거슬렸다. 이 플레이도우 향이 1시간 후에는 완전히 주가 되어버리고 소량의 오크모스가 어두움을 가미해줄 뿐이었다. 1시간 10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잔향은 약간의 달콤함, 그리고 오크모스가 주였는데, 시향지에서보다 훨씬 덜 달았고, 좀 더 오크모스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많이 났다. 대략 24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시향지에서 퍼퓸 엑스트레는 강렬한 오크모스와 시트러스로 시작했다. 2분 후 시향지에서는 시트러스가 조금 진정되고 시나몬향과 오크모스 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복숭아는 7분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그 달콤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9분 후 향수는 플로럴이 살짝 가미된 복숭아와 뒷배경의 오크모스향으로 변했는데, 19분 후 복숭아향은 사라지고 오크모스와 스파이시함, 그리고 플레이도우와는 다른 아름답고 풍성하고 부드러운 앰버향이 소량 첨가되어 향이 너무 딱딱하지 않게 해주었다. 또, 베티버 향이 흙뿌리같은 느낌을 첨가해주어서 촉촉한 느낌을 배가시켰다. 28분 후에는 다시 복숭아향이 이 조합에 첨가되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39분 후에는 갑자기 또 플로럴한 향이 강하게 나기 시작했다. 장미, 자스민, 약간의 일랑일랑이 느껴졌다. 52분쯤에는 복숭아향이 다시 조금 사그라들고 오크모스향과 스파이시함, 소량의 플로럴함이 나기 시작했다. 1시간 2분 후에 시향지에서는 장미, 자스민, 소량의 복숭아, 오크모스 조금이 되었는데, 이 상태에서 계속 복숭아가 강해졌다가 플로럴함이 강해졌다가 하다가 결국에는 오크모스와 복숭아향의 달콤함으로 잔향이 남았다. 대략 30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피부에서는 시나몬과 오크모스, 그리고 아주 소량의 복숭아향이 났는데, 2분 후에는 복숭아향이 굉장히 사그라들고 오크모스가 주가 되었으며 시나몬 향은 살짝 느낌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다가 7분 후에는 시나몬과 복숭아향이 주가 되고 오크모스는 균형을 잡아줄 뿐이어서, 마치 시나몬 파우더가 뿌려진 복숭아를 손에 든 느낌이었다. 9분 후 피부에서는 오크모스향이 점점 강해지더니 플로럴함과 프루티함을 내몰고 자신이 주가 되었다. 19분 후 피부에서는 오크모스, 스파이스, 앰버, 베티버 향이 났는데, 28분 후에선 피부에서 프루티한 단향이 강하게 났으나 오크모스와 베티버가 지나치지 않게 균형을 잡아 주었다. 39분 후 향은 점점 어두워져서, 복숭아의 달콤함과 스파이시함에 더불어 베티버가 굉장히 어두운, 거의 다크 초콜렛이 연상되는 향을 내기 시작하는데, 52분 후 다시 복숭아향이 치고 올라오며 향을 밝게 해준다. 1시간 2분 후 복숭아향은 더욱 강렬해지지만, 과즙이나 과육의 영역보다는 앞에서 말했듯이 부드러운 복숭아 껍질같은 향이 난다. 3시간 30분 후에는 다시 오크모스향이 균형을 잡아주었고, 잔향은 달콤함의 흔적만 남아있는, 스파이시한 오크모스향으로 변했다. 대략 23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사실 자크 겔랑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굉장히 내성적이고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진도 많이 남아있지 않고(1956년에 찍힌 사진이 있는데 이마저도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한다), 겔랑 가문의 조향사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클래식들을 조향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한 것밖에 없다. 당시 많은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미술 쪽으로는 인상주의를 좋아하여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시노이즈리나 재패노필리아라고 했던, 극동(특히 중국,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아 도자기를 수집하던 사람이였다. 지금 태어났으면 아마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인종차별적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향적이라고 해서 그가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이란 것은 절대 아닌데, 겔랑 가문은 가톨릭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개신교였기 때문에 개신교식으로 결혼했고,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 파문당한 일화나, 나치들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그에게 향수를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그가 이것에 굉장히 분노하여 연습용으로 만들던 아무 향수를 아무 향수병에 넣어서 줬다는 일화같은 것을 보면 자기 주관이 또렷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시에, 소위 말하는 "노력형 천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향수에 대해 "조향? 인내심과 시간의 일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어떻게 보면 겸손하고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겔랑 미츠코는 내게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준 향수다. 처음 리뷰했을 때, 나는 퍼퓸 엑스트레를 사용했는데, 내 피부가 과일향을 강렬하게 증폭시켜, 농익다 못해 살짝 과하게 달아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는 경험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상태로 향을 맡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내 피부에서는 오크모스향과 시나몬이 주였고, 복숭아향은 거의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리뷰에서 겔랑 미츠코의 환상적인 복숭아향을 찬미하고 있었고, 첫 리뷰에서도 아주 잠시 동안 복숭아의 이데아, 천상의 복숭아, 말 그대로 도교에서 말하는 천도복숭아같은 향을 조금 느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다음 시향에서는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복숭아향이 과하게 나서 가을이었는데도 벌레들이 따라다녔다. 마치 상온에 오랫동안 놔두어서 다 물러지고 곰팡이가 살짝 나 있는 복숭아 같아서 괴로웠다. 안 맞는 향수가 늘 그렇듯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하루종일 상해가는, 과숙된 복숭아향을 풍기며 지내야 했는데, 아주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재시도를 통해 미츠코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확실히 겔랑 미츠코는 코티 시프레보다 더 부드럽고, 더 곡선적이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복숭아 뿐만 아니라, 나는 시나몬향에서도 이것을 느꼈는데, 시나몬향이 없었다면 과하게 달아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자크 겔랑은 복숭아향을 넣으면서 코티 시프레를 좀 덜 충격적이게끔 변주시키면서 동시에 곡선적인 아름다움을 더한 느낌인데, 나한테는 오히려 이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과일향, 특히 프루티 플로럴 트렌드를 앞에서 말한 체향 문제로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오히려 코티 시프레는 그냥저냥 잘 받아들인 반면 미츠코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긴장과 다소 거리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쨌건,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직구는 언제든지 가능하니, 지금까지도 만들어지는 겔랑 미츠코를 한번 시향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당시의 시프레가 어떤 느낌인지 알기 위한 것이라면, 코티 시프레가 단종된 현재에는 미츠코가 구하기 훨씬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