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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mellperfumes Aug 05. 2022

겔랑 지키 (1889)

빈티지 향수 리뷰

들어가며


겔랑 지키는 우비강 푸제르 로열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에메 겔랑에 의해 만들어진 지키는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조카였던 자크 겔랑의 어릴적 별명에서,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별명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단종된 적 없이 계속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향수고, 원래는 남성들을 위해 만들었으나 잘 팔리지 않았기에 1910년대에 여성용으로 다시 목표를 바꾸자 잘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성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쓴 향수이기에(숀 코너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세르주 갱스부르, 사라 베르나르 등),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첫 유니섹스 향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으로 인공 합성향을 쓴 것은 쿠마린이 들어간 우비강의 푸제르 로열이지만, 지키에는 쿠마린 뿐만 아니라 합성 바닐린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는 특징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889년, 에펠탑이 완공된 후 2년 뒤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인 이 향수는 메르세데즈 벤츠의 첫 자동차가 나온 지 1년 후에 나왔다. 이 때문인지 향 자체도 나에게는 자동차의 가죽향을 연상시켰고, 1990년대 광고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있는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출처: https://www.stephanmatthews.com/2015/09/jicky.html?m=1


현재 팔리는 겔랑 지키는 다소 레더향이 빈티지보다 더 강렬하고, 로즈마리 향도 역시 강렬하여, 훨씬 더 각지고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잔향 역시 예전의 바닐라와 앰버, 블랙 머스크 향이 아닌 화이트 머스크와 훨씬 더 단순해진 바닐라향 때문에 더 납작하고, 레더향을 빈티지 버젼만큼 더 부드럽고 곡선적으로 표현되게끔 감싸주지 않는다. 내 기억으로는 한 번, 혹은 두 번 뿌려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팔아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향수 리뷰


겔랑 지키 역시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향수병에 담겨 나왔다. 내가 가진 보틀은 1938~1945년 사이에 나온 flacon de guerre 보틀인데,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했고, 때문에 비교적 심플하고, 치장이나 장식적인 면에서 다른 겔랑 보틀과 비교했을 때 부족해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보틀이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지만, 나름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https://guerlainperfumes.blogspot.com/p/guerlain-flacon-list.html

개인적으로 소장한 겔랑 지키 퍼퓸 엑스트레. 1938~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병이다.


1. 빈티지 퍼퓸 엑스트레: 시향지에서


시향지에서 겔랑 지키는 베르가못과 라벤더로 시작하였다. 피부에서보다 약간 더 날카롭고 말린 허브를 연상시키는 라벤더는 베르가못의 시트러스함과 더불어 향 자체에 상쾌한 느낌을 줬는데, 1분 후에는 시트러스향이 조금 더 나면서 더 가벼운 느낌을 주었다. 2분 후에도 시트러스가 주였고, 허브한 느낌은 뒤에서 다소 프레쉬한 느낌을 가미할 뿐이었다. 3분 후 시향지에서는 레더, 즉 가죽향이 아주 소량 느껴졌는데, 스웨이드나 가죽 핸드백같은 느낌보다는 새로 뽑은 차, 정확히 말하면 택시에서 느낄 수 있는 듯한, 구두나 글러브보다는 가구나 자동차가 연상되는 가죽향에 더 가까워졌다. 4분 후에 레더는 훨씬 더 사그라들었고 시트러스와 허브가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표하기 시작했는데, 라벤더와 더불어 로즈마리향이 나기 시작하였다. 6분 후에도 마찬가지로 레더보다는 시트러스와 허브가 주였고, 7분 후에도 마찬가지로 허브와 시트러스가 주가 되었으나, 18분이 지나자 시트러스와 허브에 더불어 다시 한 번 레더향이 조금 더 강하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20분 후 레더는 시트러스와 허브와 함께 섞이기 시작하였지만 그래도 프레쉬한 느낌을 주었다. 47분 후 향은 다시 허브와 시트러스가 주가 되고 레더가 뒤로 갔는데, 54분 후에 레더가 다시 강렬하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냈고, 로즈마리와 시트러스 뿐만 아니라 라벤더가 조금 플로럴하고 달콤한 뉘앙스로 변했다. 1시간 5분 후에 이 라벤더의 플로럴한 달콤함은 사라졌고, 1시간 반 후에는 완전한 레더와 로즈마리향으로 결합하였다. 1시간 46분 후 여기에 앰버가 조금 섞이긴 시작했지만 주는 허브한 레더향이었고 레더를 더 부드럽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시간 20분이 지난 후에야 시향지에서 바닐라와 앰버향이 나기 시작했으나, 아까 전의 레더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잔향은 이 상태로 28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2. 빈티지 퍼퓸 엑스트레: 피부에서


피부에서 겔랑 지키는 역시 베르가못과 허브한 라벤더로 시작했는데, 1분 뒤 피부에서는 라벤더보다는 베르가못향이 더 나기 시작했다. 2분 후 레더향이 나타났지만 동시에 라벤더의 허브함과 시트러스, 그리고 로즈마리향이 나기 시작해서 비교적 더 프레쉬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3분 후 레더향은 점점 더 도드라지게 나기 시작했는데, 시향지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가구나 택시가 연상되는 가죽향이었다. 6분 후 시트러스는 점점 사그라들고 허브, 특히 로즈마리향이 남았으며 레더향이 강렬하게 나기 시작했는데, 7분 후 약간의 앰버향이 나서 레더향의 날카롭고 각진 부분을 아주 조금 부드럽게 해주었다. 17분 후 피부에서는 로즈마리와 레더향, 그리고 조금의 앰버향으로 변했고, 19분 후 피부에서는 앰버향이 더 강하게 나기 시작해 레더향을 진정시키고 약간 더 따스하고 곡선적인 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25분 후에도 앰버향과 레더향, 소량의 허브는 마찬가지였으나, 28분 후 피부에서는 앰버향이 레더와 허브를 제치고 주가 된 상태였고 레더와 허브는 앰버에 묻히기 시작했다. 47분 후 피부에서는 레더향과 로즈마리향이 났지만 동시에 많은 앰버와 바닐라향, 그리고 다소 우디한 향이 났는데, 우디향이 앰버향에 파묻혀 구분하기가 힘들었지만 아마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 것을 보니 샌달우드인 것 같다. 54분 후에 피부에서는 애니멀릭한 머스크향이 더해져 향에 더욱 더 따뜻한 느낌을 주었으며, 1시간 5분 후에는 머스크와 앰버향, 그리고 소량의 레더향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레더향은 점점 사라지고 로즈마리향만 조금 남았으며 앰버와 바닐라쪽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 지속되었고 잔향은 앰버향으로 변했다. 20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겔랑에 대하여


겔랑 지키는 현재 생산되는 몇 개 안되는 에메 겔랑이 조향한 향수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오 드 코롱 오 드 코크다). 에메 겔랑은 겔랑 가문의 2대 조향사로서, 관련 기록이 거의 없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한다.


1828년에 세워진 겔랑 회사는 (가끔 찾다 보면 Marcel Guerlain/Hughes Guerlain 이라는 상표가 나오는데, 이 회사는 겔랑이라는 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세운 회사로서, 현재의 겔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피에르-프랑수아 파스칼 겔랑이라는 사람에 의해 세워졌다. 1853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유제니 황비를 위해 오 드 코롱 임페리얼(지금 다시 만들어져서 판매한다)을 만들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유제니 황비는 편두통이 있었지만 오 드 코롱 임페리얼을 쓰자 두통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겔랑은 황실의 공식 조향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겔랑의 상징 중 하나인 꿀벌은 원래는 나폴레옹의 상징이었다. 피에르-프랑수아 파스칼 겔랑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 2세를 위해 향수를 만들기도 하였다.


1864년에 피에르-프랑수아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에메 겔랑이 다음 조향사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형제 가브리엘 겔랑은 경영쪽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겔랑 가문 중 한 명이 수석 조향사를 하는 전통은 이 때 생겼는데, 자크 겔랑이나 장 폴 겔랑 역시 이런 식으로 겔랑의 수석 조향사가 되었다. 이 전통은 1994년 겔랑 가문이 회사를 LVMH에 팔고, 2008년 티에리 바세르가 수석 조향사로 고용되며 끝이 났다.



끝맺으며


겔랑 클래식 중에, 가장 내게 힘든 시간을 줬던 것이 바로 지키다. 이건 겔랑 지키가 내게 아주 어려운 향수였기 때문인데, 다름이 아니라 나는 로즈마리 향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이게 지키 특유의 레더향과 결합하자 마치 새로 뽑은 택시를 타는 느낌을 줘서, 좋아하기가 어려웠다. 평소에 어떤 향을 맡았는지, 그 향과 결합된 기억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따라 이렇게 향수는 개인마다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곤 한다. 나한텐 어린 시절 피곤한 상태로 택시에 갇혀서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끝없이 떠드는 라디오 소음에 노출된 기억 때문에 이 향수는 별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 향은 당시에 아주 파격적이었고, 지금까지 한번도 단종되지 않고 생산된 향수로서 굉장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은 괜찮다, 좋다, 아주 맘에 든다는 피드백도 많았다. 때문에 내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서 적어도 한 번은 맡아볼 가치가 있는 향수고, 어떻게 보면 지금의 성별과 관련없이 향수를 쓰는 트렌드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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