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향수 리뷰
겔랑 뢰르 블루는 미츠코, 샬리마와 함께 겔랑 클래식 향수 3대장 중 하나로 꼽힌다. 아직 내가 새로 주문한 겔랑 샬리마가 한국으로 배송오지 않았기 때문에 뢰르 블루를 먼저 리뷰하는 게 한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판단했다.
겔랑 뢰르 블루는 흔히 1차 세계대전 전 벨 에포크 시대 유럽의 흥취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분이 브런치에 겔랑 뢰르 블루를 리뷰하면서 제목에 "벨 에포크의 환상"이라는 묘사를 적어놨는데, 이에 동의하고 더불어 나는 당시 유행하던 약간 파우더리한 느낌의 향수 트렌드를 영리하게 겔랑식으로 변주했다고 느낀다. 아주 좋은 글이니 링크해놓겠다.
https://brunch.co.kr/@toledo900/1
내가 가진 뢰르 블루의 경우 하나는 판매자가 70년대라고 적어놨고, 이 판매자는 굉장히 다양한 빈티지 향수에 대해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70년대 보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2000년에 만들어진 보틀인데, 이 보틀에 플라스틱으로 된 스티커가 붙어 있어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빈티지 겔랑 향수를 샀을 때 연도 측정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http://raidersofthelostscent.blogspot.com/2013/10/how-to-recognize-guerlain-perfumes.html
이 사이트에서 다양한 연대의 겔랑 스티커의 모습, 색깔, 글자, 적혀 있는 코드를 분석해 연도를 측정하는 법이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한번 참고해 보시길 바란다. 예로 내 2000년 보틀의 경우 바닥에 MC1GL 이라고 적혀 있는데, 5글자니 1995~2001년 사이 보틀인 것을 알 수 있고, M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2000년에 제조되었고, 두번째 글자가 C인 것을 보아 12월에 만들어졌다.
예전에 아마도 2019년 후반~2020년대 초반인 거 같긴 한데 당시에 나왔던 뢰르 블루 오 드 퍼퓸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중간에 팔아버렸고, 시향할 때 적은 기록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록만 보고 나열하는 것은 몇 분에 어떤 느낌을 받았고, 어떤 향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러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없어 배제하기로 하였다.
현재 뢰르 블루는 레전더리 컬렉션의 일부로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있으며, 직구해도 오 드 퍼퓸밖에 팔고 있지 않다. 레전더리 컬렉션을 보면 다 똑같은, 뢰르 블루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거꾸로 뒤집어진 하트 모양의 뚜껑을 가진 보틀으로 출시되고 있는데, 사실 이 향수병은 조르쥬 슈발리에가 디자인했는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미츠코도 동일한 보틀에 담겨 나왔다. 1차대전 이후 물자가 부족해서 그냥 같은 보틀을 쓰기로 했는지, 아니면 향수병의 모양이 예뻐서 미츠코에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때문에 라벨이 없는 이런 모양의 향수병을 빈티지로 구할 때 미츠코인지 뢰르 블루인지 헷갈릴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판매자의 설명에 어느 것인지 말해주는 내용이 있는지 찾아봐도 설명이 없고, 둘 다 없어서 아무라도 좋지 않은 이상, 구매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시향지에서 2000년의 경우 살짝 아니스향의 매콤하고 알싸한 느낌과 함께 달콤함이 났고, 동시에 굉장히 시트러스향, 특히 베르가못향이 많이 났다. 3분 후, 10분 후, 13분 후에도 큰 변화는 없었고 계속 시트러스향이 많이 났는데, 20분이 지난 후에야 약간 파우더리한 향이 시트러스와 섞여서 나기 시작했다. 36분 후 드디어 종이에서는 뢰르 블루를 맡아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바닐라와 아몬드향이 살짝 섞인 듯 한, 플레이도우가 연상되는 향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향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계속 부드러운 파우더향이 났다. 잔향 역시 커다란 변화는 없고 바닐라와 아몬트 파우더, 흡사 바닐라 마카롱 코크를 분가루로 만든 듯한 향이 났으며, 대략 12시간 정도 걸린 후 사라졌다.
피부에서도 역시 큰 차이 없이 시트러스와 아니스의 스파이시함으로 시작하였다. 아주 가볍고 옅고 밝은 향이었는데, 2분이 지나자 살짝 파우더리한 향이 나기 시작했고, 10분이 지나자 파우더리한 향이 주가 되어서 플레이도우가 연상되는, 바닐라와 아몬드 향이 주가 되는 파우더 향으로 변하였다. 13분 후, 20분 후, 26분 후, 36분 후, 49분 후, 1시간 27분 후에도 마찬가지로 계속 지속되다가 드디어 1시간 47분 후에 파우더리한 향과 함께 앰버향이 나기 시작했으나 앰버향이 조금의 따스함을 더할 뿐 큰 역할은 하지 않았다. 잔향 역시 마찬가지였고, 대략 10시간 정도 걸린 후 사라졌다.
시향지에서는 마찬가지로 시트러스와 살짝의 아니스의 스파이시함으로 시작했지만, 3분 후에는 시트러스와 파우더리함이 살짝 섞이면서 동시에 네롤리가 연상되는 플로럴함이 있었다. 10분 후에 종이에서는 아까 전에 플레이도우에 비유한 파우더리함이 있었지만, 2000년에 제조된 향수에서 그 단선적인 느낌과 단순한 때문에 플레이도우와 거의 비슷했다면, 70년대 향수에서는 파우더리함 자체가 조금 더 풍성하고 풍부하고 낭만적인 느낌을 주었고, 아이리스와 바이올렛, 헬리오트로프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뭔가 어두운 느낌을 주는, 레진향과 가죽향이 연상되는 것이 있었으며, 매콤한 클로브향도 살짝 섞여 있었다. 13분 후에는 이 바닐라와 아몬드가 섞여 있는 파우더리함에 살짝의 플로럴함이 조금 더 느껴지기 시작했고, 20분 후에는 어두운 앰버와 우디함과 레더향이 느껴졌다. 27분 후에는 어두운 향은 뒤로 가고 장미향이 파우더리함과 함께 많이 느껴졌으며, 49분 후에는 이 플로럴함이 더욱 추상적으로 변하면서 파우더리함에 녹아들었다. 1시간 47분 후에는 플로럴함은 사라지고 아까 전에 잠시 느껴졌던 레더향이 앰버향과 함께 파우더리함을 더욱 따스하고 부드럽게, 동시에 더 어두운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잔향 역시 앰버와 살짝 레더함이 있는 파우더리함으로 끝났고, 24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피부에서는 시트러스와 스파이시함이 있었지만 바로 직후부터 파우더리한 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분 후에는 이 시트러스함이 아주 살짝 남아서 상쾌함을 불러왔지만 주는 다소 따스한 느낌이 주는 파우더리향이 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이리스보다는 바이올렛의 약간 달콤한 향이 많이 느껴졌다. 10분 후에 피부에서는 파우더리함과 함께 약간 장미향이 연상되는 플로럴함이 있었다. 13분 후에는 플로럴함이 파우더리함과 섞였는데, 20분 후에는 아까 전의 어두운 느낌은 조금 사그라들고 아주 깨끗한 자스민과 장미가 섞여서 마치 안개 속에 불빛이 보이는 것처럼, 파우더리함 가운데 밝고 맑은 느낌을 주었다. 26분 후에도 이 자스민과 장미는 건재했고, 36분 후에도 파우더리함을 비춰주면서 향을 밝게 해줬으나 점점 파우더리함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49분 후에는 앰버와 레더향이 향을 어둡게 해주면서 중간에 파우더리함이 아름답게 깔려있고 플로럴한 느낌이 향을 조금 더 부드러우면서 밝게 하여 아주 아름다운 대비를 이루었다. 1시간 27분 후에 피부에서는 플로럴함이 사라지고 파우더리함고 레더향, 그리고 앰버향이 남았고, 잔향 역시 이런 어두운 느낌을 주면서도 너무나도 따스하고 낭만적인 파우더리함으로 끝났다. 대략 20시간정도 지속된 것 같다.
뢰르 블루는 사색적이고 조용하고 정적인 향수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겔랑의 미츠코나 샬리마와 달리 조금 더 내성적이고 차분한 느낌이라 그런 것 같다. 미츠코는 아름다운 부드러움 속에 약간의 음울함이 있다고 하고, 샬리마는 굉장히 화려하고 자기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느낌을 준다면, 뢰르 블루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아주 서서히 드러내고, "슬픈 향"이 난다는 평가를 많이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설에 따르면 뢰르 블루는 자크 겔랑이 1912년 어느 날 프랑스인들이 "푸른 시간"이라고 부르는, 해가 진 직후 세상이 파래지는 순간에 센느 강을 걷다가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감정을 향수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 때문에 곧바로 조향에 들어가 "푸른 시간"의 이름을 가진 뢰르 블루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실제로는 자크 겔랑이 미츠코와 비슷하게, 코티의 로리간이라는 향수에 영향을 받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실제 로리간을 맡아보면 뢰르 블루와 흡사한 측면이 많이 있다. 비슷하게 파우더리한 향이 주로 나며, 진행 과정도 비슷한데, 뢰르 블루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했고, 더 우아하고 매끄러운 진행이 이어진다. 더 그리움과 사색적인 요소가 많이 느껴지고 낭만적인 향이랄까.
뢰르 블루는 서양 향수계에서는 굉장히 슬픈 향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뭔가 슬프고 그립고 향수(노스탤지어)가 가득한, 동시에 낭만적인 느낌을 많이 받은 향인데, 이건 아마도 내가 이미 향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예로, 나의 어머니에게 뢰르 블루를 맡아보라고 권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냥 포근하다, 은은하다, 슬픈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평을 하셨다. 사전 지식이 영향을 끼친 사례인가 궁금했는데, 전혀 향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도 슬픈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뭐 그냥 개인차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겔랑 샬리마가 아마 다음주 이내로 도착할 것 같으니 다음편에서는 샬리마를 리뷰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