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향수 리뷰
앞의 샤넬 No.5를 다룬 리뷰에서도 말했듯이, 겔랑 샬리마 역시 리뷰하기 부담스러운 향수다. 첫 앰버계열 향수라 거론되는 겔랑 샬리마 역시 앰버계열 향수의 처음은 아니고, 대중화시킨 향수다(코티의 앰버 앤티크 등 이 전에도 앰버계열 향수는 존재했다). 시프레나 푸제르와 달리 앰버, 혹은 앰버리 향수는 구조가 훨씬 자유분방하다. 아무튼 샬리마는 겔랑 향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거나 혹은 악명높았던 향수 중 하나며, 일설에 의하면 조향사 자크 겔랑이 지키에 새로 나온 합성 바닐린을 넣어봤다가 탄생하였다고 하지만,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코티의 에메로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앰버 향에 대해서는 여기에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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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역사가 긴 향수고 지금까지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샤넬 No.5처럼 말할 게 정말 많은데, 일단 빈티지 샬리마를 살 때 이 병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연대를 측정하는 것부터 아주 많은 정보를 털어놓을 수 있다. 그래서 이건 뒤로 빼기로 하고, 리뷰 먼저 쓰겠다.
나는 최근인 2019년에 만들어진 오 드 퍼퓸 버젼(자주 떨어트려서 여러군데 부서지고 뚜껑이 사라졌다)과 아마도 1930~50년대 사이에 만들어진 퍼퓸 엑스트레 버젼을 가지고 있다.
현대 오 드 퍼퓸은 베르가못으로 시작하는데, 날카로운 느낌이 들고, 동시에 밍밍한 느낌도 든다. 이 베르가못은 시간이 지날 수록 상쾌한 느낌보다는 마치 얼 그레이 홍차처럼 쌉쌀한 느낌이 드는데, 22분이 지나서야 조금씩 샬리마 특유의 바닐라향이 나기 시작했으나 이 쓴 향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거의 53분이 지났을 때, 베르가못은 약간 이상한 그린한 느낌과 쓴 향이 주가 되었고, 바닐라는 천천히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1시간 27분이 지나서야 바닐라향이 조금 더 주가 되었지만 이상하게 단순한 느낌을 주었고, 2시간 16분이 지나자 바닐라향이 주가 되었지만 지키에서 맡았던 것 처럼 레더향이 조금 새로 뽑은 택시같은, 고상하기보다는 조금 쎄한 가죽향을 내기 시작했다. 잔향은 이 레더리향과 바닐라향으로 끝났다. 대략 16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역시 피부에서도 밍밍하고 쌉쌀한 베르가못으로 시작했다. 1분이 지나자 바닐라향이 조금 느껴졌으나 주로 베르가못 향이 났고, 3분이 지나자 연기같은 매캐한 느낌이 섞인 바닐라와 가죽향이 조금 더 나타나기 시작했다. 10분 후, 레더향이 조금 더 강해졌으며, 22분 후에는 씁쓸한 베르가못과 달콤한 바닐라, 약간의 가죽향으로 변했고, 25분이 되자 쓴 베르가못, 바닐라, 스모키한 인센스, 그리고 레더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0분이 지나자 베르가못과는 별개로 바닐라가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앞에서 말한 자동차에서 맡을 수 있는 레더향이 강해졌고, 1시간 24분이 지나자 씁쓸한 베르가못, 인센스와 가죽향이 섞인, 어두운 앰버와 바닐라향이 났지만, 이 바닐라가 비교적 더 단순한 느낌이었다. 잔향은 바닐라와 앰버향으로 끝났고, 10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빈티지 퍼퓸은 시향지에서는 역시 베르가못으로 시작했으나, 다소 날카로웠지만 그린하고 플로럴한 느낌이 들어간, 시트러스 느낌이 강렬한 베르가못이었다. 2분이 지나자 베르가못은 씁쓸해졌던 현대 버젼과 다르게 깨끗하고 맑고 밝은 느낌으로 변했는데, 11분이 지나자 베르가못은 밝은 느낌을 주고 주는 플로럴해지며 뒤에 약간의 어두운 앰버와 바닐라가 느껴졌다. 15분이 지나자 아이리스, 자스민, 장미, 오렌지 블로섬 등 플로럴이 풍부하게 느껴지면서 마치 정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이런 플로럴함은 점점 더 강해져 23분 후에는 서로 부드럽게 녹아들어 플로럴함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하나하나의 개성을 잃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35분 후에는 샬리마 특유의 바닐라와 앰버향이 플로럴함 밑에서 조금씩 피어나오기 시작했는데, 40분 후에는 이 바닐라 향이 플로럴들을 보조하여 더욱 달콤하고 향긋하게 변모하였다. 1시간 27분 후에는 플로럴한 바닐라향으로 변해 점점 더 바닐라와 앰버향이 강해졌지만, 부담스러울만큼 어둡거나 무겁진 않고 가벼운 느낌을 가지고 가다가, 2시간 15분 후에는 앰버와 바닐라, 통카빈이 주가 되고 특히 이 때 인센스와 우디한 베티버로 추정되는 향, 그리고 레더향이 섞이기 시작했는데, 6시간 36분 후에는 어둡고 약간 스모키하면서 아름답고 풍성한 바닐라와 앰버, 통카빈의 향으로 변화했다. 잔향은 이와 마찬가지였고 대략 20시간 정도 유지된 것 같다.
피부에서도 빈티지 퍼퓸은 베르가못으로 시작했는데, 현대 버젼의 샬리마 오 드 퍼퓸과 큰 차이점이라면 베르가못이 훨씬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주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약간 날카로우면서도 시트러스 특유의 향과 밝고 풍성함이 살아있었는데, 2분이 지나자 과연 그린하면서도 즙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새콤함과 시트러스함, 그리고 약간의 플로럴한 향도 베르가못에서 느껴졌다. 10분이 지나자 플로럴한 향, 정확히 말하면 자스민과 장미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15분이 지나자 굉장히 플로럴해져서 시향지와 비슷하게 장미, 자스민, 아이리스, 그리고 오렌지 블로섬을 느낄 수 있었고, 베르가못이 꽃에 뭔가 밝게 빛나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특히, 아이리스보다는 다른 꽃들이 플로럴함을 향긋하게 풍겨왔다. 23분이 지나자 꽃의 플로럴함과 함께 아까 전에 숨어있던 아이리스가 다소 부드러운 파우더리함을 통해 피어나는 바닐라와 가교 역할을 했는데, 이 때의 바닐라는 시향지보다는 어두운, 앰버의 느낌과 함께 절에서나 느껴본, 거의 신성한 느낌이 드는 인센스 향과 함께 섞여 있었지만 무겁고 답답하기보다는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35분 후에는 플로럴함이 살짝 남은 상태에서 어두운 앰버와 바닐라, 인센스, 그리고 레더향이 느껴졌는데, 택시에서 맡을 수 있는 레더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고, 마치 가죽 장갑이나 핸드백에서 느낄 수 있는 레더향이었다. 39분이 지나자 다시 아이리스가 나타나 이 바닐라와 앰버, 인센스, 레더에 조금 부드러움을 가미해주었고, 53분이 지나자 레더와 인센스, 앰버, 그리고 패츌리가 느껴졌는데 우디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바닐라와 섞여서 거의 초콜렛같은 향이 났다. 신기했던 점은, 1시간 27분이 지나자 다시 한번 플로럴함이 강하게 밀려왔다는 점인데, 2시간 15분이 지나자 다시 한 번 어둡고, 가죽향이 섞인, 인센스향이 매캐한 스모키함을 강조해주는 바닐라와 앰버로 다시 돌아왔다. 인센스향은 계속 강렬해지다 점점 사그라들었고, 6시간 34분쯤이 되자 특유의 앰버리하고 가죽향이 조금 나는, 바닐라향이 강한 느낌으로 돌아왔다. 잔향은 이 앰버와 바닐라가 섞인 형태로, 대략 12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겔랑 샬리마에 대해서는 일단 굉장히 재밌는 일화가 많다. 샤넬 No.5를 만든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는 샬리마에 대해 "내가 바닐라를 쓰면 크렘 엉글레즈(바닐라 커스타드)나 만드는데, 겔랑이 바닐라를 쓰면 샬리마가 나온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로자 도브는 샬리마에 대해 "비상하도록 곡선적이고 관능적인 베이스 노트를 가졌지만, 하트(미들)노트는 거의 갖추지 않은" 향이며 자크 겔랑이 그정도로 강한 베이스 노트를 대조시킨 것에서 샬리마의 마법같은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했다. 샬리마의 향료 중 30% 이상이 베르가못 오일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의 시트러스함은 거의 프레쉬한 시트러스 코롱 수준이다. 그렇게 해야만 베이스 노트의 강렬함을 조절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흔히 겔랑 향수에서 자주 맡을 수 있는 겔랑 베이스 노트에 대해 "겔라나드"라고 하는데, 이 겔라나드가 잘 드러나는 향수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 당시의 합성 바닐린에는 불순물이 다소 들어 있었는데, 이 불순물이 샬리마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더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겔랑에서는 지금도 불순물이 조금 섞인 바닐린을 주문한다고 한다.
사실 샬리마는 1921년에 먼저 나왔는데, 이 당시 다른 향수 회사에서 "샬리마"라는 이름을 먼저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법적인 공방을 벌였고, 때문에 잠시 No.90이라는 이름을 붙인 채 유통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출시되었다. 특히 1920년대의 플래퍼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진정한 숙녀는 세 가지를 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고, 탱고를 추고, 샬리마를 뿌리는 것"이라는 말이 생겼다. 겔랑 샬리마를 다룬 위키피디아 영문 페이지에 보면 대중매체에서 겔랑 샬리마가 언급된 목록이 있는데, 책, 뮤지컬, 팝송, 영화, TV쇼 등 다양한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향수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회자되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건 참 대단한 일이다.
빈티지 샬리마는 워낙 유명하고 흔히 쓰였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수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동시에 어떤 시대의 빈티지를 구할 지 막막할 수 있다. 예로, 1947년에 만들어져서 1954년에 단종된 전설적인 아이리스 향수인 자크 파스의 이리스 그리 같은 경우에는 워낙 생산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빈티지를 구한다면(구할 수 있다면!) 대략 저 시간대에 만들었구나 하고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샬리마는 100년 넘게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 1930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19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75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알기 어렵다.
더불어, 샬리마는 플랭커도 굉장히 많다. 플랭커란 한 향수가 대히트를 쳤을 때 주로 나타나는데 해당 브랜드에서 그 향수를 좀 더 가볍게, 무겁게, 다른 재료를 넣거나, 빼거나 해서 다른 버젼을 만드는 것을 플랭커라고 부른다. 예로, 샬리마 퍼퓸 엑스트레와 샬리마 오 드 퍼퓸은 같은 향수의 다른 버젼이라고 본다면, 플랭커는 한 향수의 재해석된 버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 드 샬리마, 샬리마 퍼퓸 이니셜, 샬리마 오 레제르, 샬리마 오데 아 라 바니유, 샬리마 수플레, 기타 등등 정말 많다. 때문에 플랭커와 본래 샬리마를 구별해야 하고, 이 와중에 샬리마의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역사 중 여러 다양한 모양의 병을 썼다.
다행히, 서양 블로그를 찾다 보면 빈티지 겔랑 향수 병이나 샬리마에 대해서 정리한 블로그 포스트가 많다. 이 사람들 역시 블로그 운영자이고 내가 이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 것을 쏙 번역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단한 소개와 링크를 달겠다.
https://guerlainperfumes.blogspot.com/p/guerlain-flacon-list.html
이 글에서는 겔랑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모든 향수병을 정리해놨다. 샬리마에 쓰인 병을 찾고 싶다면, 이 페이지에서 Ctrl+f를 누른 후 shalimar 이라고 치면 어느 병을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https://guerlainperfumes.blogspot.com/2014/08/shalimar-c1925.html
같은 블로그에서 샬리마에 쓰인 병을 정리해놨으나, 위의 링크와 달리 모든 형태에 대해 사진을 달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두 링크를 함께 열고 두번쨰 페이지를 읽다가 이게 무슨 병인가 궁금할 때 위 링크를 참조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http://angelairasperfumes.blogspot.com/2012/04/guide-to-vintage-shalimar.html
이 글에서도 역시 빈티지 샬리마 구분법이 나와있다.
http://raidersofthelostscent.blogspot.com/2013/10/how-to-recognize-guerlain-perfumes.html
https://raidersofthelostscent.blogspot.com/2016/11/guerlain-stickers.html
이 두 글에서는 겔랑 향수의 연대를 추측하는 법을 써 놨다. 이러려면 보통 향수병에 스티커(라벨)가 붙어있거나, 아니면 박스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박스나 스티커가 없을 경우 곤란할 수 있지만, 아직 스티커가 있을 경우에는 굉장히 유용한 참고자료가 된다. Raidersofthelostscent는 이 외에도 여러 빈티지 향수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참고자료로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블로거인 Kafkaesque가 샬리마 병을 연대측정하는 법에 대해 글을 썼다. 감사하게도 이분께 이메일을 통해 해당 블로그 포스트에 쓴 사진 일부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맡았다.
이 모든 글을 종합했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추릴 수 있겠다.
1. "No.90"이라고 쓰여 있는 향수병의 경우 1921~1925년 사이의 굉장히 오래된 보틀이다.
2. 라벨에 "guerlain paris"등 다른 말이 써져 있지 않고 "shalimar"라고만 써있을 수록 오래된 보틀일 가능성이 높다.
3. 향수병 밑에 유리로 글씨가 써져있을 경우, 두툼하게 파인 글자가 써져있을 경우, 그리고 가늘게 써져 있을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뒤로 갈수록 오래된 보틀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소장한 보틀의 경우 병 밑에 스티커가 없으나 글씨로 추정컨데 1930~1950년 사이 어드메 정도로 추측된다.
4. 보라색 상자, 특히 조금 더 파란색에 가까운 보라색이 아니라 자주색에 가까운 보라색일 경우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말 모양 그림이 있을 경우 더욱 그러하다.
5. 유리병 밑에 스티커 라벨이 있을 경우 위의 raidersofthelostscent 링크에서 한번 대조해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내겐 이 외에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빈티지 겔랑 샬리마가 있다. 여기에서는 굳이 리뷰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현대 샬리마 오 드 퍼퓸과 비교했을 때 플로럴하고 우디한 향이 강하게 느껴지거나 하는 차이가 없었다. 다만, 확실히 앰버와 바닐라의 향이 더 깊었고, 인센스의 스모키함과 레더향이 훨씬 더 잘 느껴졌다. 현대 오 드 퍼퓸에서도 이런 향이 존재했지만 더 단순하고 단편적인 느낌이었다면, 70년대 빈티지의 경우 훨씬 더 풍성하고 풍부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1930~50년대 빈티지 겔랑 샬리마는 나의 모든 경험을 부숴버릴만큼 충격적이었다. 나는 겔랑 샬리마를 좋아하고, 자주 뿌리고 다니며, 여러가지 버젼을 느껴봤기 때문에, 베르가못-바닐라,앰버로 이어지는 이 구조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생각을 다 깨트렸다. 엄청난 플로럴함으로, 거의 앰버향이 아니라 플로럴향이라고 느낄 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운 플로럴의 향연이 시작되었고, 앰버-바닐라 베이스 역시 그저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디함과 패츌리에서의 단 느낌이 섞여, 더욱 아름답고 풍성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향을 묘사하는게 잘못이라고 느껴질만큼의 아름다움이었다.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향수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내 겔랑 샬리마에 대한 사랑을 불태워준, 즐겁고 유익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