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향수 리뷰
사실 샤넬 No.5같은 아주 유명한 향수를 리뷰하기는 꽤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다. 비슷한 경우로는 겔랑 샬리마가 있다. 마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나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리뷰하는 느낌이다. 또 관련해서 쓸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역사 관련한 내용은 뒤로 빼고, 연대 측정법과 간단한 소개만 쓰기로 했다.
샤넬 No.5는 향수계에서는 "le monstre", 즉 괴물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한 향수다. 많은 사람들이 샤넬 No.5가 처음으로 알데하이드가 들어간 향수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L.T. Piver의 Reve d'Or(1889, 1905년 재조합하면서 알데하이드가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라는 향수에 처음 쓰였다. 또, 겔랑의 아프레 롱데(1906)에는 아니식 알데하이드라는 다른 종류의 알데하이드가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우비강의 껠끄 플뢰르(1912)에도 알데하이드가 들어갔다. 그러나 샤넬 No.5에는 알데하이드가 과하게 들어가서 특정 효과를 내는데(이게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의 조수가 실수해서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아마도 이건 과장이거나 그저 전설일 뿐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통해 알데하이딕 플로럴 향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샤넬 No.5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빈티지도 모조품이 많다. 폰트가 다르거나, 향수병 모양이 이상하다 싶으면 가품일 가능성이 높다.
위 사진의 경우, 일단 샤넬 폰트가 다르고, 향수병도 모양과 뚜껑이 다르다. 뚜껑에 복잡한 문양이 생겨져 있고, 또한 병도 정사각형이 아니라 조금 굽어 있다.
위 사진의 경우, 폰트도 다르고, 정사각형이어야 하는 병 윗부분에 옷걸이같이 세모난 어깨가 붙어있다. 개인적으로 가품 중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라, 이렇게 생긴 보틀은 꼭 피하는 것을 추천한다.
실제 샤넬 향수병은 연도에 따라 이렇게 달라졌으며, 떄문에 디자인을 봤을 때 이걸 참고하는 것이 좋다. 또, 향수병 밑을 봤을때 Chanel이라고 적혀있지 않은 경우 가품이고, 1920~51년까지는 No.5 의 o 밑에 작은 점이 찍혀 있으며,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까지 샤넬 병에 "New York Distributor" 이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1970~1987년에는 퍼퓸 엑스트레의 경우 라벨에 이름 밑에 "perfume" 이라고 적혀 있으며, 1988년부터는 "parfum"이라고 적혀 있다. 1987년부터 오 드 퍼퓸의 경우 paris 혹은 new york이라고 라벨에 적혀 있다. 기타 많은 내용이 적혀있는 링크를 밑에 첨부하겠다.
https://chanelperfumebottles.blogspot.com/p/how-to-dating-chanel-bottles.html
내가 가진 샤넬 No.5의 경우 병에 New York distributor 이라고 적혀 있지만 동시에 병 모양이 위에 첨부한 표에 따르면 50년대 모양이기 때문에, 아마도 50년대 보틀일 것이다. 샤넬은 다른 브랜드에 비하면 향수의 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샤넬은 프랑스 그라스에 장미와 자스민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비교적 퀄리티가 일정하나, 최근 백화점에 가서 시향했을 때 여러 규제 때문에 영향을 받았는지 알데하이드가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미들 노트의 풍성함이 사라져 조금 납작하고 단순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샤넬 No.5의 구조 자체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시향지에서는 굉장히 차갑고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났다. 알데하이드는 쨍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약간 양초같은, 왁스같은(머리에 바르는 왁스가 아니라 아주 어릴때 초등학교 복도와 교실에 왁스칠을 하곤 했는데 그런 향이다) 향이 나는데, 여기에서는 왁스보다는 정말 에르네스트 보의 의도대로 빙하나 얼음이 연상되는 느낌이 들었다. 3분 후, 알데하이드와 함께 약한 레몬향이 나기 시작해, 향을 더욱 상쾌하고 시원한 방향으로 가져갔다. 8분 후에는 이 시원하고 상쾌한 향과 함께 추상적이고 달콤한 꽃향이 조금 섞이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는 시원한 느낌의 알데하이드와 레몬이였다. 11분 후에는 시트러스가 좀 더 강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났다. 18분 후에도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네롤리와 소량의 일랑일랑이 느껴졌다. 특히 이 일랑일랑이 향을 조금 더 부드럽게 해 주었다. 35분 후에는 장미와 자스민향이 살짝 났지만, 그래도 차가운 느낌은 여전하였다. 12시간이 지난 후에야 피부에서처럼 앰버와 장미, 자스민이 섞인 빈티지 플로럴함, 그리고 아이리스의 파우더리함이 느껴졌고, 20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플로럴함과 앰버 느낌이 많이 났다. 총합해서 대략 30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피부에서도 차갑고 시원한 알데하이드의 느낌이 났으나, 시향지보다는 훨씬 더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차가운 알데하이드와 함께 따스하고 파우더리한 향이 같이 났기 때문이다. 또, 이 알데하이드가 시향지에서처럼 계속 차갑게 지속되지 않고, 2분 후 앞에서 말했던 다소 왁스같은 향이 났다. 4분이 지나자 피부에서는 향이 점점 더 포근해지기 시작했고, 5분 후 장미와 자스민향이 나기 시작했다. 플로럴함이 시향지와 달리 덜 추상적이고 각각 구별이 가능했다. 7분이 지나자 파우더리한 아이리스향이 더 강해져, 빈티지 파우더같은 느낌을 더했다. 11분이 지나자 앰버향이 플로럴과 섞여 더욱 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기 시작했는데, 15분이 지나자 앰버향이 더욱 강해져 빈티지 향수의 느낌을 더하였다. 게다가 여기에 살짝 애니멀릭한 향이 첨가되었는데, 20분 후 파우더리한 장미, 자스민, 앰버의 향연이 만들어져서, 초반의 차가움과는 전혀 다른, 풍성하고 깊이 있는 느낌을 더하였다. 30분 후에는 바닐라향이 나기 시작하였고, 43분 후에는 여기에 다소 우디한 베티버 향까지 나기 시작해, 정말 아름답고 풍부한 향을 냈다. 3시간이 지난 후 피부에서는 확실한 마이소르산 샌달우드향이 나서, 앰버와 플로럴, 바닐라, 머스크에 더욱 더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고, 4시간 반 후에는 오크모스가 무겁게도 느껴질 수 있는 이 조합에 그린함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잔향은 앰버와 플로럴, 애니멀릭한 머스크, 그리고 다소 우디한 느낌으로 진행되었고 대략 22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아, 샤넬 No.5,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의 모던함을 상징하는 향수며, 구글에 쳐보면 샤넬 No.5에 대한 여러 책도 나와있고, 유명인(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마릴린 먼로와 캐서린 드뇌브겠지만)들이 주로 사용하던 바로 그 향수다. 코코 샤넬은 "왜 여성에게서 꽃향기가 나야 하는가?" 라는 말로 이 향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정말 그가 이렇게 믿어서인지, 아니면 당시 샤넬의 라이벌 중 하나였던 레 퍼퓸 드 로진느를 의식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귀족 여성들은 장미나 바이올렛같은 향을 썼고, "평판이 좋지 않은" 여성들은 머스크나 자스민같은 향을 썼다고 하는데, 그걸 섞으면서도 우아함을 더한 향수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는 시베리아에서 있을 때 얼음이 서린 겨울의 호수에서 영감을 받아 차갑고 쨍한 알데하이드를 넣었다고 한다. Tilar J. Mazzeo가 쓴 No.5에 대한 책 <The Secret of Chanel No. 5: The Intimate History of the World's Most Famous Perfume>에서는 코코 샤넬이 어렸을 때 생활한 수녀원에서의 경험이 이것에 투영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코코 샤넬은 깨끗한, 위생적인, 갓 씻은 것 같은 향을 연상시키는 향수에 끌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코코 샤넬에게 1~5, 20~24가 적힌 향수를 가져왔는데, 샤넬은 그 중 다섯번째, 즉 5번이 맘에 들었고, "나는 내 드레스 콜렉션을 5월 5일, 한 해의 다섯번째 달에 선보일것인데, 그러니 5번이라는 이름으로 가자, 행운을 불러올 것이다." 라고 했다. 위에 쓴 책에선 5라는 숫자가 샤넬에게 어떻게 어릴 때 큰 영향을 줬는지에 대해 쓰여 있지만, 그것까지 여기에서 다루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샤넬 No.5는 샤넬의 베스트셀러중 하나면서도 블라인드 테스팅을 하면 사람들이 그닥 선호하지 않는 향 중 하나로 꼽힌다. 이걸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 향수 자체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링크의 글쓴이와 동의하는 지점이 많다.
https://www.fragrantica.com/news/Is-Chanel-No-5-Obsolete-15018.html
여기서 글쓴이는 샤넬 No.5에 대해 1. 너무 "여성스러운" 향수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는데 현재의 "여성스러움" 혹은 성별에 대한 인식이 No.5가 만들어지고 유행하던 시대와는 많이 차이가 나고 2. 코코 샤넬은 "깨끗한"향을 내길 원했고, 예전에는 많은 비누나 향이 들어간 샴푸 등에서 No.5처럼 알데하이드가 들어간 파우더리함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과일향 등 향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알데하이드 플로럴을 "깨끗함"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으며 3. 소비자가 샤넬 매장에 가서 시향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 소비자는 에르네스트 보가 조향한 퍼퓸 엑스트레나 오 드 뚜왈렛, 오 드 코롱이 아닌 오 드 퍼퓸 버젼을 시향하게 되는데, 이것은 80년대에 만들어졌고 80년대 향수 트렌드에 맞췄기 때문에 지금의 트렌드에 비교했을 때 뒤떨어져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비슷하게, 이 향 자체가 너무 많은 유사품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의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우아함보다는 조금 질적 측면에서 떨어지지만 비슷한 향에 노출되었고(한국 화장품 브랜드 중 파우더에 비슷한 향을 내던 것이 있다. 지금도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거기에다 위의 세 요인을 더하면 별로 특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No.5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마릴린 먼로!) 사람들은 이름을 들을때마다 어떤 향이 날지 속으로 이상적인 향을 상상하게 되는데, 현재 소비자들이 노출되는 여러 향은 No.5와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것이 혹평에 일조할 수 있다. 유명세 때문에 너무 많은 정보에 휩싸여 향을 맡기 전에 이미 정보의 오염에 의해 객관적인 평을 내리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굉장히 유명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느껴 심적 거리감을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남성의 경우 "여자향수"라는 이미지가 너무 세기 때문에 처음부터 거부감을 느끼거나, 혹은 향에 대해 잘 모르는데 그냥 유명하고 이름은 들어 봤으니까 여자친구나 어머니, 아내, 누나, 여동생, 기타 여성 친지나 지인에게 사줬다가 상대방이 취향에 안 맞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며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양인이다. 무엇이 "깨끗한" 느낌을 주는지, "여성스러운" 향은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이 서양인들과 다르다.
나같은 리뷰어의 경우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이 향이 좋다고 하면 "향수꼰대"부터 "근데 이거 사실은 별로 현대적이진 않다", "그렇게 좋은 향은 아니라면서요?" 라는 말을 듣게 되고, 나쁘다고 하면 "향알못", "어떻게 이 향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라는 말을 듣게 된다. 즉 내 주관이 너무 티나는 순간 마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안 좋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주의하면서 동시에 서론에서 썼듯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리뷰를 남겼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발언을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자세는 그저 이 향수를 향 자체로 감상하기로 마음먹고 부담감을 느끼지 않은 채, 백지 상태로 시향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딜 봐서 쉬운 일인가. 내 10살짜리 조카도 샤넬 No.5가 뭔지는 어디서 어렴풋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수에 얽힌 전설, 역사, 이 향수를 쓴 많은 사람들이 가진 이름의 무게에서 풀려나 가볍게 생각하며 향을 맡아보자.
먼저 이 글에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코코 샤넬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끔찍한 사람이다. 야망을 가진, 여성 패션에 혁명을 가져온 사람은 맞지만, 그는 동시에 나치 스파이였다. "웨스트민스터"라는 나치 스파이 암호명이 있었고, 요원번호 F-7124로 불렸다. 전쟁 초기 1939년에 샤넬이 한 것은 "지금은 패션을 선보일 때가 아니다"라고 하며 문을 닫은 것이다. 이것은 샤넬이 나치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1936년 샤넬 직원들이 프랑스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에 참가해 더 짧은 노동시간과 봉급 인상을 요구한 것에 대한 복수일 가능성이 높다. 샤넬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유대인들에 대한 심각한 차별과 혐오를 보이던 당시 웨스트민스터 공작(히틀러는 우리의 친구라고 발언했다)과 내연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 조치로 4천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하지만 동시에 향수 부티크는 열어서, 독일군에게 향수를 팔았다.
동시대의 루시엥 르롱이 비시 프랑스 정권 하에서 나치들이 파리의 패션 산업을 베를린으로 옮기려 하자 목숨을 걸고 직원들은 파리에서 형성된 공생적 관계에서만 일할 수 있으며, 이것을 베를린으로 옮긴다고 같은 효과가 날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열변하여 대부분 유대인 여성 난민으로 이뤄진 직원들을 보호하고 있을 때, 파리의 시민들이 아사 직전의 상태가 되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을 때, 코코 샤넬은 한스 군터 본 딩클라게라는 나치 장군의 연인이 되어 독일군의 본부로 쓰이던 리츠 호텔에서 고급 술과 음식을 즐기며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나치들과 사교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한스 군터 폰 딩클라게는 프랑스에서 반유대인 매체를 후원하고, 레지스탕스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으며, 스파이 행위를 통해 많은 프랑스인과 프랑스계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또, 샤넬이 윈스턴 처칠과 웨스트민스터 공작하고 인연이 있었던 점을 이용해 샤넬을 연락책으로 써서 영국과 휴전 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샤넬이 스파이인게 들통났고, 처칠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 후 그는 1951년 뉘른부르크 전범재판에서 풀려난 후 샤넬과 스위스에서 재회한 다음 1954년까지 함께 살다가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으로 가서 편히 여생을 누리다 죽었다.
코코 샤넬의 향수 사업은 샤넬 본인이 아닌 피에르와 폴 베르트하이머라는 유대인 형제에 의해 공동창업되었는데, 샤넬 No.5가 유명해지자 샤넬은 이들을 내쫓고 싶어했고(결국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아예 코코 샤넬 전담용 변호사를 고용할 정도였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베르트하이며 형제가 미국으로 피신한 상황이었고 아리안 법에 의해 유대인들은 사업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법적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말소하고 자신에게 자신의 회사를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베르트하이머 형제가 떠나기 전에 유대인이 아닌 친구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상태여서 그러하지 못하였다. 형제는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샤넬 향수를 생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 샤넬 직원이 목숨을 걸고 향료를 프랑스에서 빼돌려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자 샤넬은 샤넬 향수 회사 밑에서가 아닌, 자신이 직접 향수를 만들었고,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자신의 향수를 "호보켄(뉴욕 근처 뉴저지의 작은 마을)따위에서 만들고 있다"는 식으로 불평하며 깎아내렸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향수 회사는 베르트하이머 형제가 전시 샤넬 향수로 인한 모든 이익과 미래 전세계 샤넬 향수 판매이익의 2%, 그리고 코코 샤넬이 요구하는, 아무리 사소한 비용까지 포함하는 생활비를 죽을 때까지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체결하며 베르트하이머 형제에게 넘어갔다.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코코 샤넬과 나치와의 연관성 때문에 이미지에 손상이 가면 사업에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파리가 해방되던 날 미군부대가 들어오자마자 샤넬은 가게 문을 열고 미군들에게 샤넬 향수를 나눠줬다. 그러나 이게 그가 갑자기 반유대인 정서를 떨쳐냈거나 나치를 거부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스위스로 피난을 간 샤넬은 앞에서 말했지만 1954년까지 연인 한스 군터 폰 딩클라게와 그의 SS 부하인 발터 셸렌베르크와 함께 살았고, 1952년에 셸렌베르크가 죽자 장례식 비용 일체를 댔다. 그러면서도 이미지에 안 좋기 때문에, 자신이 나치와 협력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지우려 노력했고 법정에 섰을때 다른 나치 동조자들을 고발해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즉, 샤넬은 미국인들이 구도를 잡자 거기에 바로 붙었으며, 실제로 스위스로 도망간 이유도 프랑스에서는 그의 나치 행적 때문에 반감이 심해서였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독일군과 친하게 지내거나 인연이 있던 여성들을 매춘부라고 조롱하고 머리를 밀어버린 후 동네에 행진시키며 비웃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코코 샤넬이 이걸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칠 등 유명인사들의 관계 때문이었고,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샤넬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유명세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코코 샤넬은 동시대 라이벌들을 성별관련없이 혹독하게 조롱했으며(엘사 스키아파렐리와의 라이벌 구도가 유명한데, 무도회에 가서 샤넬은 스키아파렐리가 나무를 형상화한 옷을 입고 있자 춤추는 척하며 양초쪽으로 데려가 옷에 불을 붙였다. 스키아파렐리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나치 스파이였고, 유대인들을 혐오했으며, 성소수자들을 싫어했고, 이 밖에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추가: 이 글은 그러니까 샤넬을 보이콧하라는 말이 아니다. 코코 샤넬은 자식이 없었고 지금 샤넬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베르트하이머 형제의 자손들에게 가고 있지 샤넬의 친지들에게는 안 가고 있다. 그저, 샤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에 대한 재조명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이 긴 글에 대해 더 쓰는 것이 독자에게도 나에게도 굉장히 피로한 일이지만, 개인 일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쓰고 마칠까 한다. 내 외할머니는 교사로 오랫동안 일하셨는데, 60년대 당시 교사는 굉장히 엘리트 직종이었기 때문에 가끔 선물이 들어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의하면, 할머니는 60년대에 큰 샤넬 No.5 보틀(아마도 퍼퓸 엑스트레일 것이지만, 코롱이어도 대단한 것이다)을 선물받으셨는데, 할머니께서 좋아하는 향이 아니었기에 화장실에 놓고 방향제처럼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일화를 듣고 어머니한테 그거 남겨두지! 지금 팔면 그게 얼만데! 그냥 어디다 꽁꽁 넣어두지! 라고 울부짖었다. 어머니께선 할머니는 안 그랬으면 아마 버리셨을껄? 이라고 답하셨다. 이 세상 어딘가에 버려졌을 외할머니의 샤넬 No.5...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너무 아깝다.
*덧붙이는 말: 어째서인지 한국어 웹상에서, 금목서 향이 샤넬 No.5에 들어갔다는 말이 퍼지고 있는 듯 하다. 이 자리를 빌려 명확히 하자면, 대부분의 금목서 오일, 압솔뤼, 기타 추출물은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내가 아는 바로는 1972년 장 파투의 1000이 금목서 향을 서양 퍼퓨머리에 히트시키기 전까진 아예 서양에서 금목서를 향수의 목적으로 수입하지 않았다. 하물며 1921년에 나온 샤넬 No.5에 금목서 향이 들어갔을 리가 만무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샤넬 No.5의 화려함을 금목서 향에 비유한 것이 퍼지지 않았을까 하고, 실제로 금목서 향과 샤넬 No.5의 향은 매우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