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13화)
집에 책이 참 많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라 했던 탓도 크고 국어국문학 전공 덕분에 ‘읽기’ 행위 자체에 중독되어 버린 덕분이기도 하다. 방송을 시작하면서는 더 많은 공감할 이야깃거리를 찾아 나서느라 책에 대한 애정을 멈출 수 없었고. 결혼을 하면서는 취향은 달라도 그의 서적, 나의 서적이 얽히며 책장이 한결 더 복잡해졌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류가 가장 많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철학책, 종종 숨 쉴 틈 없이 빠져들어 읽는 내 취향 소설책, 기타 각종 분야의 전공서적, 교양수업 서적들까지 빼곡하다. 책장만 휘이 둘러봐도 마음이 참 알차게 차오르는 느낌이다. 마음이 살찌는 느낌.
애정 하는 책장 한 칸에 요즘 비밀 하나가 생겼다. 종종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와 책 많다” 감탄하고 구경하기 마련인데 그 책장 한 칸만큼은 쉽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대개 ‘남의 책’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책이 빼곡하게 꽂힌 광경에 ‘꽉 차 오르는 경이’를 표한다. 그다음엔 가볍게라도 책의 제목을 살피기 마련이고. 책 주인의 최근 심경이나 근황, 고민거리들은 대개 근거리의 꽂혀 있는 책의 겉모습만 훑어도 빼꼼히 드러난다. 내 아이에 대한 고민을 풀고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그 책’들이 자리한 공간만큼은 누군가에게 내보이기가 껄끄러웠다. 뭐 관심 있으면 이 책 저 책 읽을 수도 있는 거지… 쿨하게 생각하고 싶지만 왠지 그 칸을 들키고 나면 현재 내 아이의 상황과 그에 대한 고민을 일일이 설명해야만 할 것 같아서 이래저래 꺼려졌다. 아동의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다룬 책들. 제목부터 떡하니 ‘자폐’라는 글자가 쓰여 있으니 괜스레 몸이 움츠러들었다. 책 제목이 안 보이도록 반대로 꽂아두는 편이 나았다.
그 책장 한 칸만큼은
쉽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자폐증 아동을 위한 ESDM>, <집에서 하는 ABA 치료 그로그램>, <서두르지 않고 성장발달에 맞추는 ABA 육아법>… 표지 제목에 자폐라는 말이 버젓이 쓰여있으면 그 누군가로부터 “이건 왜 (읽어)…?”라는 질문이 찾아들까 봐 괜히 겁이 났다. 아무 사연도 없는 듯 평화로운 육아를 하고 있는 ‘척’ 하고 싶어서였을까. 일일이 내 아이의 자스 의심 징후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기운이, 혹은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그 제목만 눈에 안 띄어도 누군가의 연민이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소위 ‘예민할 수 있는’ 제목을 가진 책은 거꾸로 꽂아두기 시작했다. 눈에 안 띄면 ‘자폐’와 관한 불편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나마 ‘응용 행동 분석’은 나았다. 영어로는 Applied Behavior Analysis, 줄여서 ABA.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다 보니 그게 뭐 하는 건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쩌다 들어본 적이 있다 해도 ‘자폐’ 치료를 위해 효과적인 방법이라 연관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적은 듯’ 했다). 쉽게 말해 제목을 들켜도 부담스럽지 않은 책들. 적당히 소화 가능한 제목의 책들은 가지런히 꽂아두고 살짝 마음 쓰이는 책들은 앞과 뒤를 바꿔 돌려 꽂았다. 흰색으로 겹겹이 중첩된 책 페이지만 보이도록 기이하게. 온갖 제목 다 내보여도 스스럼없는 책장 주인이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나는 숨기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엄마인 셈이었다. 가려두고 싶은 게 꽤나 많은 불투명한 엄마표 책장.
내 아이의 자폐스펙트럼 징후에 대해 쿨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아이의 ‘스펙트럼’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굳이 내가 먼저 내보이고 싶지는 않은 게 엄마 마음이었다. (나름대로 조기 중재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괜한 선입견을 줄까 봐, (안쓰러워할 일도 아닌데) 불필요한 동정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서… 한 마디로 생각이 참 많은 엄마였다. “어머,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이 있어?”, “왜 자폐 치료에 대한 책을 읽어?” 쓸데없는 질문은 잠깐이라도 차치하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얄팍한 전략. ‘자폐’는 나와 내 아이의 인생과 관련 없는 단어라고 애써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아예 책장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였다면 좋았으련만 그럴 수는 없는 거고.
아무 사연도 없는 듯
평화로운 육아를 하고 있는 척
숨기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엄마인 셈이었다
지금이야 아이가 공식적인 진단을 받기도 전인데, 만약 ‘자스’를 부인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이 책장의 칸은 서서히 더 늘어갈 테다. 슬쩍 반대로 꽂아두고 싶은 책들도 더 늘어나겠지. 그 누구도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내보이기 껄끄러운 단어가 있다는 건 무거운 일이다. 거꾸로 꽂아둔 책들을 당당히 자연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날이 언젠간 찾아올까. ‘자폐’라는 두 글자가 콕콕 박힌 책 표지 앞에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편편하게 굴 수 있는 때가 있기는 할까. 혹은 아이의 징후가 서서히 사라져서 불편한 두 글자와 영영 이별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는지도 모를 일.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여전히 나는 책장의 한 칸 앞에서 묵묵히 책을 거꾸로 꽂아두고 있다. 누군가가 ‘자폐’ 징후를 눈치채더라도 슬쩍 모르 척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혹여 바로 꽂힌 책에서 ‘자폐’ 글자를 발견하더라도 뜨악해하지 않고 (말 없이) 응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