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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디 May 16. 2021

엄마에게 와줘서 고마워

첫 아이 출산 후기

어느덧 아기와 생활한 지 두 달이 넘었다. 아기를 기다리던 10개월의 임신 기간은 잊힌 지 오래다. 아기와 하루 종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체감은 반년 정도 지난 느낌이다. 흔히 말하는 50일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몸도 마음도 제법 편해졌다.






나는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았다. 출산 예정일 아침에 갑자기 양수가 터져 급하게 분만실로 갔고, 8시간의 진통 끝에 아기를 만났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압축하여 표현하면 ‘무섭고 신비로운 신밧드의 모험’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의 삶에서 8시간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고, 그 끝에는 엄청 소중한 보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진통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나 또한 도대체 얼마나 아프길래 낳자마자 ‘둘째는 없어!’를 각오하게 만드는 것일지 궁금했다. 결혼 전, 친구들과 출산에 대해 얘기를 할 때면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워서 우린 다들 애는 못 낳을 거라고 단념했다. 그 친구들 대부분이 벌써 애엄마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나였지만 임신을 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얼른 아기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훨씬 커서 진통에 대한 두려움은 까먹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이미 다 한 차례 겪은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출산일에 임박해 오자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제왕절개로 바꿀까 고민도 했다. 제왕절개는 회복이 느리고, 수술 후에 바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더 크게 느껴져서 분만 방법을 바꾸진 않았다. (나에게 밥은 무척 중요하다.) 유튜브로 진통 시 도움되는 호흡법을 미리 연습했다. 이전에 몇 번 과호흡으로 응급실에 간 적이 있던 터라 걱정됐다. 옆에서 남편이 잘 코칭해 줄 수 있도록 같이 연습했다. 무서움은 점점 단단한 각오로 변하였고, 피할 수 없다면 현명하게 넘겨보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출산 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진통은 진통대로 다 겪고 결국은 응급 제왕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다. 출산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땐 그게 얼마나 고되고, 엄마로서 슬픈 결과인지 알지 못했다. 미처 이전에 그렇게 출산한 친구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응급 제왕으로 가지 않기 위해 나는 진통이 왔을 때 시간을 너무 끌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호흡과 힘주기에 집중한다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시작되면서 ‘아 이런 게 진통이구나! 제법 견딜 만 한데?’라고 착각했다. 아주 극심한 생리통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30분 만에 바뀌었다. 진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졌고,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잠시 다른 생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힘주기를 할 때는 마치 깜깜한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기가 내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고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환희에 가득 찼다.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살았다!’


아기를 본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몸에서 이런 아기가 나오다니 너무 신기했다. 아기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껴져서 더욱 신기했다. 아기는 간호사 선생님이 데리고 나갔고 나는 후처리를 위해 분만실에 남겨졌다. 30분 정도 걸렸지만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모든 게 끝나고 다시 남편이 분만실로 들어왔다. 남편을 보자마자 참았던 설움을 토해내듯 엉엉 울었다. 아기를 낳던 바로 그 순간에는 이 정도로 울진 않았는데 남편과 단둘이 분만실에 남게 되자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만난 것 마냥 서글프게 울었다. 진통 중에는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프고 힘들었어서 모든 게 무사히 다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코로나로 인해 내 아이를 제대로 안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병실에서는 모자동실이 금지되어서 정해진 면회시간에 신생아실에 가서 창밖으로 아기를 보고 오는 게 전부였다. 내 아이를 낳고서 제대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다행히 출산 다음날부터 수유콜이 오면 신생아실 옆에 있는 수유방에서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은 같이 갈 수 없었다. 수유방에 앉아서 우리 아기를 기다리던 그 짧은 30초의 시간이 아직도 생각난다. 마치 소개팅에서 상대방과의 첫 만남을 기다리는 것 같이 무척 설레었다.


잠시 후 간호사 선생님이 우리 아기를 데려와 내 품에 안겨주었다. 아기를 처음으로 안아보는 시간이었다. (아기를 낳자마자 분만실에서 누운 채로 아기를 안겨주지만 제대로 안는 것은 아니다.) 속싸개에 싸여있지만 꿈틀거리는 아기의 몸짓을 처음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작고 소중해'라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새삼 느꼈다. 아기가 살짝 눈을 떴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울자 간호사 선생님이 살짝 당황하시면서 왜 우시냐고 물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아기가 너무 예뻐서요'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이 웃으시며 그래도 참으라고, 아기 낳자마자 울면 눈 나빠진다며 달래주셨다.


사실 나는 출산할  보다 회복할  훨씬  아프고 힘들었다. 가슴이 베일 듯한 통증의 젖몸살로 밤마다 괴로웠고, 회음부 통증이 심해서 앉는 것도, 서는 것도, 눕는 것도  아팠다. 조리원으로  이후에도 계속 아파서 힘들어했는데  신기하게도 수유콜이  때마다 왠지 모를 힘이 났다. 혼자서 앉아있는 것도 힘든데, 아기를 안고 앉으면 통증이  심해지는  당연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하나도  아팠다.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조리원 선생님께서  말을 들으시고선 그랬다. "그게 모성애예요." 나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를 향한 엄마들의 초월적인 힘을 보며 나는 저럴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나도 조금씩 슈퍼우먼이 되어가고 있나 보다. 1kg짜리 아령 두 개를 들고 운동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손목이 약했는데 어느새 6kg가 넘는 아기도 번쩍 안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아기를 보는 일은 때때로 무척 힘들고, 갑자스런 짜증이 솟구칠 때도 있지만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기를 볼 때면 '어디서 이런 천사가 내려왔을까'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존재만으로 너무 소중한 우리 아가, 엄마 아빠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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