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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수수 Jun 19. 2019

어떤 생의 마침표

 배가 멈췄다. 꾸벅꾸벅 졸다가 도착했단 안내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23구역이라고 안내인은 설명했고, 저 멀리 영종도와 작약도, 인천대교, 월미도가 보였다. 열두명의 가족들이 갑판 위를 빙 둘러 줄을 섰다. 안내인은 능숙한 솜씨로 유골함 뚜껑을 열었고, 상주를 맡은 아빠가 먼저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 내 차례가 왔다. 미디어에서 봤던 유골은 고운 가루였는데 (아마도 밀가루이지 않았을까) 실제 유골은 크기가 고르지 않았고, 장갑을 끼고 있어도 거칠거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라 한 주먹 가득 쥔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 장갑을 벗은 뒤에도 유골이 손바닥에 묻어있는 것 같았다. 유골을 다 뿌리는데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삼일 전, 큰아버지가 위독하다고 늦은 밤 엄마가 메시지를 보냈다. 그 후로 세 시간이 지난 새벽 두 시, 동생에게서 큰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예상지 못하게 눈물이 쏟아진 건 기억 속 큰아버지가 모두 불쌍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가 불쌍해서, 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큰아버지는 전쟁 통에 홍역을 앓았는데, 그때 고열로 인해 지적장애를 갖게 되었다. 큰아버지는 할머니와 둘이 평생을 살았고, 어릴 땐 할머니 댁에 가면 큰아버지의 사탕과 요구르트를 먹곤 했었다. 큰아버지는 꼽추였고, 사탕을 좋아했고, 눈치를 많이 봤고,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큰아버지에게 다가가지도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항상 한 걸음 떨어져 쳐다보기만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둘째 큰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할머니의 큰 집은 보증으로 넘어갔고, 그때부터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월셋집 작은 빌라를 전전했다. 큰아버지의 장애로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래도 할머니는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팔았고, 밀가루를 치대서 칼국수도 끓였고,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큰아버지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빳빳한 새 돈으로 만원씩 세뱃돈도 주셨고, 명절이면 양말도 한 켤레씩 줬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할머니가 자주 아팠다. 사촌언니와 함께 찾은 할머니의 반지하 방에서,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몰라서 못 먹었다고 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해놓고 두 분은 많이 드시지 못했다. 짜장면도 사줬고, 용돈도 만원이나 줬다. 그 날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사는 동안 그 날이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아 나를 아프게 할 줄 그땐 절대 알지 못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막내 삼촌 집과 그들의 임대아파트를 오가며 지내셨다. 할머니는 거동이 어려웠고, 이불 위에 앉아있으면 큰아버지가 이불을 끌어 할머니를 거실과 방으로 옮겼다. 할머니는 고향에 가야 한다고 돈을 꿔달라 했다. 북에서, 엄마와 오빠들이 기다리는데, 택시비 이만 원만 빌려주면 집에 가서 돌려준다고, 만약 내가 안 주면 벼락 맞아 죽을 년이라고 욕해도 된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할머니 옆에 앉아있었다. 내 기억 속 그랬듯 항상 할머니 옆에 그냥 앉아있었다. 허공을 보며 자주 중얼거렸고, 우리 눈엔 안 보이는 뭔가가 보이는 것 같이 굴었다. 그게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손님이 찾지 않는 늦은 밤이면 영정사진 앞에 있는 큰아버지를 종종 보았다. 술에 취한 아빠는 바보 아들이 제일 효자라고, 마지막까지 엄마 옆에 있어준 유일한 자식이라고 말했다. 큰아버지는 할머니 사진 앞을 떠나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는 십 년을 더 사셨다. 임대아파트에서 지내셨고, 요양원에서 지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충격을 받아서 힘들어했다고 했다. 한 번 봬야 하는데 생각으로만 십 년을 보냈다.


 큰아버지의 장례는 형제들과 조카들이 치렀다. 조용하고 단출했다. 큰아버지를 찾는 친구 하나 없었다. 입관 전에 본 큰아버지는 작았다. 다음 생엔 건강하게 오세요, 기도했다.


 가족들은 큰아버지에 대한 비슷한 죄의식을 갖고 있을 거다. 그래서 반가움에 안부를 주고받다가 울었고 침울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아이들을 대신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촌언니는 한번 오고 갈 때마다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자리를 지켰다.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큰아버지를 떠올리면 할머니의 기억이 함께 난다. 오롯이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게 미안했다. 나를 비롯해 가족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큰아버지의 생의 마침표가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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