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방앗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수수 Aug 18. 2020

만년필을 사다


 만년필로 끄적이는 걸 좋아했던 시간이 있었다. 책을 읽다 공감이 되는 글귀를 적어놓기도 했고, 소설로 쓰고 싶은 소재도 적기도 했고, 그날그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꽤 솔직하게 적었었다.


 만년필을 좋아하게 된 건 보조작가를 하던 때에 만년필을 쓰던 작가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의 필체는 만년필과 너무 잘 어울렸고, 때문에 만년필이 더 근사해 보였다. 언니는 항상 무언가를 끼적였고, 나는 그런 언니를 따라 했다.


 임신과 육아를 하며 두 자루의 만년필을 샀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굳어버렸다. 만년필 관리에 서툰 나로서는 물에도 담가보고, 이쑤시개로 굳은 잉크를 빼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뒤론 더 이상 나를 위한 필기구를 사지 않았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도 생각하고 다음으로 미뤘다. 다음에 이 감정에 대해서 써봐야겠다, 다음에... 다음에...  다음은 없다는 걸 알면서 다음으로 미뤘었다.


 일 년에 몇 번씩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쓰는 사람이 되려면 써야 하는데 쓰지 않고 바라기만 한다.  


 아직 해야 할 공부도 많고, 읽어야 할 작품도 많고... 쓰기를 자꾸 미루는 내게 "다음은 없어. 지금 하지 않으면 넌 쓰는 사람이 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만년필을 샀다. 몇 년째 서랍 속에 있었던 금문교가 그려진 수첩도 꺼냈다. 이번엔 반드시 만년필을 버리지 말아야지... 만년필이 굳기 전에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지... 나의 게으름을 아이 핑계로 포장하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나는 두 아이들을 키워야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놓지 말자고 단단히 결심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생의 마침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