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들

당신이 잠든 사이에

by 옥수수

나는 맘에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끝장을 내버려야 하는 편에 속한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지막 회를 봐야 하고 (실제로 밤을 새워가며 끝내버린 드라마가 많다), 맞고와 윷놀이, 모두의 마블에 꽂혀 밤새 현질을 하며 게임을 하기도 했었다. 소설도 만화도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속이 후련했다.


집순이에 뭐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걸로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는데 나보다 더 강적들을 만난 건 결혼 후였다.


남편이 덕후라는 걸 모르고 결혼한 건 아니었다. 그의 덕력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영화, 판타지 소설, 레고, 프라모델, 게임, 테마파크, 아키하바라, 피규어, 음악, 바비큐, 와인에 뭐든 흥미로운 건 제대로 파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만원이 있으면 만화책을 빌려보고, 십만 원이 있으면 만화책을 사서 보고, 백만 원이 있으면 만화책과 책장을 살 놈"이라고 남편의 친구가 말했었는데, 그 말이 아주 정확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애가 없나 애가 있나, 돈이 없나 돈이 있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런 그를 인정하기로 한지 오래다.


시누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녀는 남편보다 경제적 이유로 사이즈만 작을 뿐, 덕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스펀지밥 마니아다. 스펀지밥이 그려진 온갖 것들을 모으고, 입고, 갖고 다닌다. 귀여운 캐릭터가 있는 것들을 보통 사 모으는데, 삽살개 도토리를 키우면서 경제적 이유로 소비를 줄였다. 나는 여러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비해,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보고 또 본다. 도깨비는 이제 대사를 다 외웠을 것 같은데, 어쩐지 겨울이 오면 또 봤다고 할 것만 같다.


남편과 시누이, 덕후 남매를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시어머니다. 시어머니야 말로 진짜 덕후다. 어머님은 책, 드라마, 영화, 게임을 좋아하시고, 요즘은 유튜브 중독인 듯하다. 주로 물고기 잡는 영상 같은 걸 보시는 것 같다. 아버님의 오랜 입원 생활 때, 어머님은 간호를 하며 양양이(?)라는 게임을 낙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고 한다. 하루는 게임을 하기 위한 하트가 부족했는데, 그 하트를 위해 시누이가 헤어진 남자 친구한테까지 연락했다는 웃지 못할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 같이 프렌즈 팡에 꽂혀서 열심히 하다가 인기가 끝나고 아무도 하지 않을 때에도 어머님은 홀로 게임을 하고 계셨다. 독감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와중에도 빨간 머리 앤을 달렸다고 한다.



이런 우리가 다 같이 루미큐브에 꽂혔던 때가 있었다.


작년 봄이었다. 루미큐브를 핸드폰 게임으로 하고 있던 시누이에게 어떻게 하는 거냐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님은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 루미큐브를 꺼내 게임을 알려주셨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어머님은 이 게임을 예전부터 좋아하셨다.)


어머님, 시누이, 나는 아이를 재우고 나면 호빵맨이 그려진 작은 교자상 위에 판을 벌렸다. 1점당 100원이었고, 집안 곳곳 굴러다닌 많은 동전들은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였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우리의 게임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허리가 안 좋아 바닥에 오래 앉아있는 게 힘든 시누이를 위해 교자상을 접고, 게임 테이블까지 만들었다. 게임을 하다가 출출해지면 어머님은 비빔국수를 비비기도 했고, 마른오징어 몇 봉지를 쌓아놓고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남편도 몇 번 함께 했는데, 게임을 잘해서 재미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가 잠들기만 하면 열심히 게임을 했던 우리가 게임에 시들해지고, 루미큐브가 다시 서랍으로 들어간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회사 일로 바빠진 시누이 때문에 멤버가 부족해서 그만뒀던 것 같다.


루미 큐브에 한참 빠져서 지냈을 때, 나는 아이의 발달 문제로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의 문제는 어렵지만, 그때 내가 울지 않고 그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던 건 게임 때문이 아니었을까 괜히 생각해본다. 아이가 일찍 잠들어서 게임에 집중하고 웃고 떠들고 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둘째까지 생겨서 아이들을 재운 뒤에 게임 한 판이 더 어려워졌다. 언젠가는 아이들을 재운 뒤 혹은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날이 온다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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