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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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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9장: 감시자.

이런 부제목을 하나하나 다 읽는 놈이 있을 리 없잖아?

정신의학과 환자 보고서

환자명: 폴 윌리엄 Jr.  
담당의: 피어스 정신과 전문의.

환자의 초기 상태.
환자는 30대 중반의 마른 체구를 가진 백인 남성으로, 내원 당시 정돈되지 않은 장발과 심한 악취가 나는 낡은 정장을 입고 있었음. 위생 상태는 극도로 불량하였으며, 환자의 외형은 수 주간 세면 및 의복 교체를 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됨. 입원 당시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함께 병원 내 복도를 배회하며 지속적으로 '로즈'라는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며, 이는 환각성 혼란(delirium) 증세의 일환으로 판단됨.

정신 상태 및 주요 증상.
환자는 지속적인 환각을 보고 있다고 진술하였으며, 이 환각 속 인물인 "로즈"를 찾아다니는 강박적 행동을 반복적으로 보임. 면담 중에도 여러 차례 시각적, 청각적 환각 증세를 호소하였으며, 이는 명백한 정신 분열적 사고의 일종으로 보임. 환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 그림'이라거나 '숲이 진짜가 아니며 모든 것이 벽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의 망상적인 발언을 자주 함. 특히 환자는 '가면'이라 호칭하는 안면부, 특히 이마와 볼을 손톱으로 긁는 자해 행동을 보였으며, 이는 반복적인 피부 손상과 출혈을 유발. 상처는 감염 위험이 있으며, 이로 인해 상처 부위의 소독 및 감염 예방 처치가 필수적이었음. 환자가 자해 행위를 멈추지 않자 의료진은 손을 구속하여 추가적인 손상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를 취함.

행동 및 신체적 증상.
환자는 입원 직후부터 심한 불안 발작(anxiety attack)을 경험하였으며, 이는 주로 강박적인 공포감과 연관된 증세로 나타남.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높고, 혈압이 급상승하는 등의 신체적 반응이 동반됨. 환자는 반복적으로 의료진에게 담배를 요구하였으나, 이는 불안감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회피 행동으로 보임. 금연 구역 내에서 이러한 요구는 거부되었으나, 환자의 반응은 점점 더 공격적이 되었음.

환자는 수면 장애(insomnia)를 보이며, 진정제 투여 전까지는 거의 잠들지 않음. 자해 충동과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행동을 보였으며, 특히 "자신의 눈을 파내달라"는 비이성적인 요구를 지속적으로 함. 이는 심각한 자해 경향을 나타내는 정신병적 증상으로, 곧바로 진정제를 투여하고 환자를 구속복 착용 상태에서 병원 내 개인 객실로 격리시켰음.

진단 및 치료.
환자는 심각한 정신분열증(schizophrenia)과 강박적 망상(obsessive delusions)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됨. 특히 환각과 망상 증세는 구체적이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음. 의식과 현실 인식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증상이 두드러지며, 이는 환자의 일관된 사고 과정 및 정서적 조절 능력의 손상으로 이어짐. 자해 충동은 고도로 위험한 상태로, 환자의 자살 위험성에 대비한 상시 관찰 및 구속 조치가 필수적임. 현재까지는 진정제(주사제 형태로 Haloperidol) 및 항불안제(Lorazepam)를 투여하여 증상을 안정시키고 있음. 추후 치료 계획은 추가적인 항정신병제(antipsychotics) 투여와 더불어 집중적인 정신치료(psychotherapy) 세션이 필요하며, 장기적인 예후는 불투명함. 환자의 망상 및 환각 증상이 너무나도 고착되어 있어, 약물 치료에 대한 반응 여부를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함.


그날 밤, 린다 간호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객실로 들어갔다. 방 안은 새하얀 벽과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했고, 한쪽 구석에는 폴이 구속복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의 눈빛은 혼란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피어스 전문의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은 안전합니다. 환자의 객실에 들어가십시오." 린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지시에 따라 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앞에서, 폴은 계속해서 중얼거리다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택시! 택시 좀 태워줘요!" 피어스 전문의는 한 발짝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환자의 요구대로 하세요. 택시 기사를 연기하십시오." 린다는 겁을 먹은 듯 폴 앞에 서서 서툴게 택시 기사를 흉내 냈다. "목적지가 어디요?" 폴은 잠시 멈추더니,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루클린." 그는 멍한 눈으로 린다를 쳐다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불 좀 빌립시다." 린다는 잠시 당황했지만, 피어스 전문의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흡연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세요." 린다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시늉을 했고, 상상 속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폴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눈을 좁히고 상상의 담배를 받아 드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마치 진짜 담배를 피우는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 순간의 폴은 그녀에게 저 환각이 섞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듯 보였다. "계속 환자에게 말을 걸고 질문하셔야 합니다." 피어스 전문의의 차분한 지시에 린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신병원에는 어쩐 일이요? 아,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 린다는 질문의 어색함을 느꼈지만, 상황을 어떻게든 이어나가야 했다. 폴은 그 말을 듣자마자 흥분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정신병원이오? 난 이 앞 공원 공중화장실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 입니다만." 폴의 말은 현실과 환각이 섞인 기괴한 대답이었고, 피어스 전문의는 환자의 모든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기록하고 있었다. 린다는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말고…" 그녀는 상황을 이어가려 애쓰며 계속해서 말을 던졌다. "이봐, 옷이 그게 다요? 노숙자도 아니고…" 린다의 말을 듣고도 폴은 그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순간, 피어스 전문의는 옆에 있던 작은 라디오를 켰다. 음질은 거칠었지만, 도메니코 모두뇨의 Volare가 흘러나왔다. 그 낡은 멜로디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폴의 긴장된 몸이 약간 풀리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구속복을 입고 있었지만, 음악이 그에게 잠시나마 현실의 끈을 놓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환자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피어스 전문의가 조용히 말하며 린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합시다." 린다는 긴장을 놓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폴을 바라보았지만, 음악이 흐르자 방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Volare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동안, 환자는 마치 한순간 다른 세계로 빠져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린다는 피어스 전문의에게 속삭이며 조용히 항의했다. "얼마 전에는 저보고 우주비행사를 연기하게 하더니, 또 경찰에, 이번엔 택시 기사요? 무슨 요정에 여왕, 로즈, 달님까지! 전 배우가 아니라고요, 피어스 박사님!" 피어스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멀리 떠 있었고, 린다의 불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린다 씨... 우주 비행사는 저도 같이 했고.. 전 사투리도 쓰며 밀렵꾼에, 심지어 노숙자 역할도 했잖아요? 우리 둘 다 이 일엔 고생이 많습니다. 린다 씨도 좀 참아요." 피어스 전문의의 말에 린다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가 지금까지 겪은 상황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며, 린다는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그 순간, 방 한구석에서 폴의 움직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몸의 경련과 함께 그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서 가 봐요." 피어스 전문의가 다급하게 말했다. 폴은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속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어스 전문의가 틀어놨던 Volare의 음악도 꺼져, 방 안은 갑작스럽게 침묵에 휩싸였다. 린다는 재빠르게 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해야 했다. 그녀는 간신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택시 기사를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도착했다오. 택시비는?"

폴은 마치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허공에 돈을 건네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여기 있네. 잔돈은 됐어."

그는 그리 말하곤, 잠시 뒤 갑작스럽게, 그리고 기괴하게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방 안에 울려 퍼지며 차가운 공기를 타고 번졌다. 피어스 전문의와 린다는 그 소리에 얼어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폴의 웃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폴은 갑자기 무표정해지며 어딘가 급하게 걷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매우 목적이 있어 보였고,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집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폴은 다시 숨으려는 듯 몸을 낮췄다. 그의 행동은 ‘감시자로서의 그날’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피어스 전문의는 폴의 이러한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치료 1일 차의 환자 모습과 동일하군. 같은 행위를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고 있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폴이 그날의 사건을 끝없이 반복하는 이 패턴은 단순한 강박적 행동 이상이었다. 피어스는 린다에게 눈짓을 하며 지시했다. "린다 씨, 로즈를 연기하세요." 린다는 묵묵히 피어스의 지시에 따랐다. 담배를 손에 쥐고, 천천히 문을 여는 시늉을 하며, 이어서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는 흉내를 냈다. 그녀의 동작은 지쳐 보였지만,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린다의 이러한 연기에 폴은 반응하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긴장되었고, 눈빛은 이전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어스는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한 표정으로 노트를 빠르게 적었다. “아니... 하, 처음으로 돌아갔군. 망상 속 현상이 말 그대로 무한히 순환하는 건가?” 그는 환자의 이 끝없는 반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답답함과 무력감이 뒤섞인 표정이 서려 있었다. 이 순환은 단순한 정신 착란이 아니라, 깊은 의식 속에서 굳어져 버린 기억의 미로였다. "린다 씨, 우리가 이때를 다시 묘사하는 게 처음은 아닌 거 잘 아실 겁니다. 이 환자 입원 첫날, 첫 연기 때 대사 기억하시죠? 그걸 다시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피어스 전문의는 말했다. 린다는 순간 당황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감 속에서도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윈스턴 씨, 잠깐 시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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