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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Apr 08. 2016

분홍실과 '즐거운 일기'

실도 제대로 안 풀리는데 인생이 퍽도

“되는 일이 없어!”


PT 때문에 삼성역으로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다. 뱃살이 쪘는지 어쨌는지 정장 바지의 단추가 뜯어져 있었다. 7시 20분, 집에서 삼성역까지 1시간은 걸릴 텐데! 반짇고리를 뒤져 아무 실을 풀고 꿰맨 뒤 택시에 올라탔다. 문득 물끄러미 배꼽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분홍색 실이 뾰족하고 튀어나왔다. 배꼽 아래 분홍 색실… 하필 분홍색 실을 풀었네… 뭔가 근엄하지 않은 여자 같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까만 네임펜으로 분홍색 실을 벅벅 칠했다. 단추 하나로 이렇게 고달프다니,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생.”


단추 하나 꿰매기 위한 실도 제대로 안 풀리는 데 100세 인이 생각한 대로 풀릴 리가 없다. 잠시 자리를 떴는데 그 사이에 높은 분께서 다녀가신 다던지 하는 일은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다. 게다가 웃긴 건 “꼭 이럴 때 사장님 다녀가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걸로 봐서는 모두가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지만 아무도 방지할 수 없단 사실이다. 알면 자리 안 비우면 되는데, 아는데, 근데 꼭 비우고 싶어 진단 말이다.


이처럼 인생은 정말 가지각색의 변수들로 인해 창조적 방향으로 풀리고 꼬인다. 불확실한 변수들이 튀어 오르는 곳, 내가 단 1초도 예측하지 못한 무언가가 벌어지는 곳이 나를 둘러싼 360도의 내 세상이다. 그런데 사실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인생의 변수는 각기 확률이 다르다. 26살 직장인인 나에겐 17시 30분에 새 업무가 떨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지만, 우연히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기울일 확률은 낮아져 간다. 어떤 변수의 확률이 높으냐에 따라 인생의 불확실성은 재미가 되기도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슬프게도, 삶이 안정될수록 불확실성은 스트레스가 될 확률이 높다.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줄 큰 변수들은 요원해져 가고 아주 사소하지만 날 무척이나 짜증 나게 할 작은 변수들은 전쟁터의 지뢰처럼 박혀있기 때문이다. 문득 일상의 어떤 순간, 변수가 사라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제발 그냥 쉬기로 한 날은 쉬고 누굴 만나기로 한 날은 만났으면 한다. 나만의 소소한 일들을 약속해놓고 느끼는 행복을 추구한다.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의 첫 연은 그런 류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시인은 어머니의 건강함, 번역료, 소개팅. 모든 일들이 예측대로 흘러감에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의 시에서는 ‘그렇게 될 일들이 그렇게 됐네! 즐겁다!’라는 식의 묘사들이 이어지고 짙은 ‘허무함’의 감성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 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붕붕 크랙 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 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아싸라비아’. 그리고 “나, 안 즐거워 보이지? 응, 맞아! 나 안 즐거워!”라고 쿡 찌르는 듯한 ‘도로아미타불’. 코리아의 유구한 하늘 아래에선 변수의 존재로 인한 행복감이 아니라 변수의 부재로 인한 행복감이 최대치다!라고 냉소적으로 외치는 듯하다.


요새 나는 스마트폰에 종종 짧은 메모를 쓴다. 최근에 언젠가 맥주 한 잔 할 것 같았던 사람과 맥주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눠서 즐거웠다. 또, 어떤 여자와 사귈 것 같았던 내 친구가 진짜 사귀게 됐길래 축하해주었다. 아! 내 고향 창원 성산구에선 내가 지지하는 국회의원이 당선될 것 같았는데, 진짜 지지율이 매우 많이 차이가 나길래 기뻤다. 아, 즐겁다. 즐겁다고 해야 하는 걸까? 정녕 변화가 아닌 현상 유지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계속 '즐거운 일기'를 쓸 수 있는 걸까?


최승자 시인을 따라 외쳐본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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