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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May 17. 2016

문학의 이유

작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에 부쳐

노벨상에 관심을 두기 전에 한국 문학에 더 관심을 보여야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책은 읽지 않으면서 노벨상을 원한다.

/ MYTHILI G.RAO의 칼럼, The New Yorker, Jan.28.2016


오늘 작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뒤 그녀의 책, ‘채식주의자’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한강을 언제부터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올해 1월쯤 미국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반향을 일으켰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그 사실을 한국 언론이 보도할 때부터였다. 바쁜 우리는 문학과 책에 관심이 없다. 안 읽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국민 3명 중 1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가구당 월평균 도서 구매비는 처음으로 2만 원 이하로 떨어졌다.

/ 연합뉴스, 05.17.2016


읽지 않으면 자신의 문학적 취향을 알 수 없다. 나는 작가 한강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문체가 조금 거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나의 취향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남달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국문학과라 남들보단 문학을 '읽을' 기회가 많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다만 '읽었고' 나와는 맞지 않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취향이 없으면 자신의 문학적 호불호를 가를 판단기준도 없다. 게다가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도 모른다. 결국 문학 외부의 무언가에서 이유를 빌려오기 마련이다. '읽지 않는' 우리 사회가 문학의 존재 이유를 끝없이 이상한 방식으로 증명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장면 1. 2012년 모 광고대행사.

존경하는 CreativeDirector님께 강의를 들었다. 문학에 대해 깊고 자세히 아는 것은 광고업에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획득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된다고 했다. 문학을 광고에 적용한 다양한 사례도 들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광고업에서 문학이 가진 장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그런 것 말고, CD님의 인생에서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CD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결의 이야기도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더 재미있었다.


우리는 그 CD님의 강의를 들은 후 문학을 열심히 '읽고자'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안나 카레니라... 광고업에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문학이 광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숙달되지 않았다. PPT 기획서를 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고작 대학생이었으니까 말이다. '먹고사니즘'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문학의 존재 이유로 가져와도 이렇게 쉽게 흐지부지 된다.


장면 2. 2016년 영화 '동주' 개봉 즈음.

살면서 시집이 그렇게 화제가 되는 것은 처음 봤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 디자인을 그대로 적용한 시집이 발간됐을 때였다. 페이스북에 하루가 멀다 하고 타임라인에 올라왔다. 근대적인 디자인에 사람들을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응답하라 1988 및 베이퍼 웨이브와 같은 복고 흐름을 타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판사는 판매량에 고무됐는지 윤동주와 백석의 초판 디자인을 적용한 시집도 잇따라 발간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의 존재 이유를 외부에서 빌려온 최악의 사례라 본다. 문학이라는 내용을 빙자해 활자의 모양이라는 디자인'만' 팔았다.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각본의 어마 무시한 판매가 문학의 부흥으로 잘못 오독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지적할 따름이다. 어차피 문학으론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설득할 수 없으니 아예 다른 분야로 상품화해서 파는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오늘의 장면을 바라보고자 한다.


장면 3. 2016년 '한강' 신드롬

17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채식주의자'가 이날 오후 3시 기준으로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하루 동안에만 3천200부 팔려나갔다. 전날에 비해 판매량이 무려 16배나 뛰었다.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에 있던 500부가량의 재고가 오전 중에 모두 판매돼 '채식주의자'를 사보려는 독자들이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은 한강의 다른 저서들로 매대가 채워졌다.


계기가 어떻게 됐든 사람들이 문학을 '읽게' 된다면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계기로 '채식주의자'를 사람들이 읽고, '채식주의자'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또 그것이 '읽는' 행위를 일으키는, 선순환이 생긴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몇 번의 얄팍한 경험으로는 물음표만이 떠오른다. '맨부커상', '최고의 권위', '해외에서 인정', '뉴욕', '영국'.. 문학 외부의 무언가가 여전히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쉽게 부스러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문학은 어떤 이유로 읽어야 하는가? 사실 문학은 역사와 철학이 그렇듯 이유가 없어야 한다. 응당 당연히 우리 삶 속에 존재해야 한다. 스토리에 대한 갈망과 아름다운 언어에 대한 희구는 인간 역사와 내내 함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학은 앉은뱅이처럼 홀로 서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세워줄 다양한 이유의 목발을 찾는다.


문학이 타락했다고 하지만, 인간이 타락할 만큼 타락한 데에 불과하다.

/ 괴테


읽지 않는 인간이 문제일까, 읽히지 않는 문학이 문제일까. 답은 결국 '읽지 않는 인간만큼 문학도 읽히지 않도록 타락한 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카르텔을 형성한 폐쇄적인 문학계. 읽혀야 하는 이유를 문학의 우수성이 아닌 권위에 두고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구조. 돈에 얽매여 시간에 얽매여 읽지 않는 독자들만큼 문학계도 돈과 시간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그랬고 잡음이 왕왕 나오는 신춘문예 제도가 그렇다.


더 나쁘게도, 어쩌면, 문학이 읽히지 않고 독자들이 읽지 않는 이유는 더 큰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바뀌어진 현대인의 감수성, 돈을 욕망하고 시간에 얽매이게 된 그 섬세한 변화들이 문학을 멀리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돈이 나쁜 것인가? 효율을 무시해야 하나? 비판의 요체를 통찰력있게 찾기는 쉽지 않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까 깜깜하다.


우리는 왜 읽지 않는 시대에 사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과 함께 가야 하는 이유는 앞서 제기한 저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문학은 거뜬히 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통찰하고 사회를 조망하는 그런 일을 해내곤 한다. 탈근대를 지향한 '날개', 노동문제의 진실에 다가선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청년 문제를 담대하게 풀어낸 '표백', 새로운 미학을 개척한 '여장남자 시코쿠', 그리고 폭력성을 집요히 탐구한 '채식주의자'까지.


어쩌면 이것이 이 모든 작품을 '읽어야' 하는, 또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한강의 수상을 축하하며, 이번 수상이 '읽는' 사회로의 반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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