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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un 07. 2016

사주팔자와 '착각'

사주 아줌마가 분명히 올해는 대운이라고 했다.

2014년, 무려 24살. 꽤 추운 겨울, 하는 것도 없이 (전)남자친구와 압구정을 헤맸다. 시려워지는 콧등. '얘는 어떻게 된 애가 한 번을 데이트 코스를 안 짜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이 튀어나올 찰나, 그는 말했다. "사주 볼래?" 돌아보니 압구정 사주카페 골목이었다. 임기응변에 강한 녀석. 어쨌든 그날은 태어나서 처음 스스로의 사주를 보러 간 날이었다. 쌍커풀 수술을 한 듯한 눈에 검정색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사주 아줌마가 말했다. "어머~ 둘이 궁합도 잘 맞는 편이네~ 아가씨는 26살이 대운이야~" 그리고 덧붙여 내 25살도 나쁘지 않다나 뭐라나.


굳게 깍지 꼈던 두 손이 침착하게 풀린다
좋은 징조일까?

심보선, 착각 中


그 이후 아줌마 말만 믿고 열심히 25살을 살았다. 그러나 2015년은 가히 나에게 최악의 해였다. 지긋지긋한 인턴 생활, 남자친구와의 이별, 뜻하던 문턱에서 너무나 쉽게 여러 번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나쁘지 않은 것은 어디에 있는지? 뭘로 행복해야 하나? 9월이 괴로워 10월을 기대하면 10월이 더 최악이 형국. 산 넘어 산. 이런 상황에서 이상하게 사주가 또 생각이 났다. 24살때 만난 사주 아줌마가 26살이 대운이라 그랬는데, 아 갑갑하다.


결국 또 찾은 사주집. 평생 사주. 3만원.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제가요, 요새 너무 우울하고 힘들어서요. 아 그러셨어요. 보통 사주 풀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진행된다. 제가 요새 걱정이 많아요. 그래요, 걱정이 많을 시기네요. 요새 많이 혼란스럽죠? 이 자리가 내 자리인지 모르겠고, 그런가봐요? 마무리는 항상 이런 식이다. 지금이 제일 힘든 시기에요. 걱정 말아요. 곧 해가 떠요. 조금만 참아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사주 아줌마도 그러더라. 26살, 아주 최고의 해에요. 그리고 난 호쾌하게 3만원을 투척한다.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을 구매한 값이다.


사주는 게다가 뛰어난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도 한다. "내가 네 감정 쓰레기통이야?" 이 스테인리스 같이 차가운 말.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자신의 우울함이 특별난 것이 아님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내가 유별나게 징징대는 편이라는 걸. 나에게도 헬인 세상이 너에게 헬이 아닐 이유가 하등 무엇이 있단 말이냐? 징징이인 나에겐 사랑에 기대고 우정에 기대어 슬픔을 나누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스테인리스 같다. 그런 나에겐 '믿음의 오아시스'가 필요하다. 우울감을 털어낼.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야! 그러나.


요즘따라 또 눈은 왜 이렇게 침침하고 몸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

심보선, 착각 中


대운이라는 2016년. 나는 어제 보증금 2000만원에 모든 일이 꼬여 인생수업료를 크게 지불할 위기에 처했다. 무언가 일들이 착착 꼬여가는 모양새가 아주 빼어난 플롯을 보여주더라. 이건 아무래도 '불운'이라 칭할 무엇에 가깝겠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 앉아 2000만원 생각을 하다가 퇴근 즈음 본체만 교체하려 그랬는데 모니터가 부수어진 것이었다. 정말 USB만 뽑았다 꽂았을 뿐인데. 연결 단자가 겉보기엔 멀쩡한데, 정황상 내부가 부수어졌다고 하더라. 이것도 아무래도 '대운'이 아니라 '불운'에 가까운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사주팔자를 다시 찾지 않는 것이 정상이겠다. 2016년 대운으로 가득찼다더니 가족들이 죄다 동원된 금전문제가 발생하는 꼴을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올해, 그냥 제발 평타만 쳤으면 좋겠다. 아, 사실 돌이켜보면 남자친구와 함께 간 2014년의 그 사주도 그랬다. 우리 궁합 잘 맞는다며? 2015년 나쁘지 않다며? 전혀. 우리의 이별이야기는 1000:1의 자소서를 통과할만큼 강렬한 비극드라마 썼고, 그 덕분에 최악의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했는데 말이다. 하나도 안 맞네. 사주 망해라!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너 또한 하찮아지지 않겠니?

심보선, 착각 中


그렇지만 하찮은 내가 하찮은 삶을 살기 위해선 여전히 믿음을 포기할 수가 없다. "지금은 하찮지만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 그런 말을 해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또다시 사주팔자가 생각난다. 사이가 좋았던 시절의 임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가씨, 종교 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힘들고 그러니까 종교가 있어야지. 불교나 기독교나 뭐라도 하나 믿어요." 그래. 믿음, 있어야지. 근데 내 종교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까지 해주면 참 좋겠어. 작년도 틀리고 올해도 틀리고 내년도 틀릴 것이 분명해도 용서할테니. 


미지의 역술가를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혹시, 혹시 모르니까. 내년은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26살이 대운이라던 역술가들은 돌팔이들일지도 모르니까. "2017년도 대운의 연속이에요."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응당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다시 한 번 그 명제를 미친듯이 믿을 테니까.


저 꽃은 네가 벚꽃이라 믿었던 그 슬픈 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략)
가난과 허기는 또 다른 일이고

심보선, 착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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